세계 교회 신앙유산 순례 - 로마에서 아시시까지
프란치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안선희
아시시를 향한 10일간의 도보순례
이탈리아의 여름을 대표해 줄 수 있는 단어는 바로 작열하는 태양입니다. 이런 무더운 여름 7월의 중순이 지나면 그곳의 젊은 프란치스칸들은 8월 2일 포르치운쿨라 전대사 축일(포르치운쿨라 성당은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심장과 같은 장소이다. 1216년 8월 2일 교황 오노리오 3세는 성인의 요청으로 이곳 포르치운쿨라를 방문하는 모든 신자에게 ‘아시시의 용서’라는 특별한 대사를 주도록 허락하였다.)을 지내고자 아시시로 향하는 10일간의 도보순례(la marcia francescana)를 합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이 도보성지순례에 제가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성 프란치스코께서 제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제가 그 여정에 참여했을 때는 8년 전 그러니까 2001년 무더웠던 여름이었습니다. 저는 50명 정도의 로마 프란치스칸 청년들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로마에서 아시시까지의 거리는 서울에서 대전까지 정도로, 로마에서 아시시까지 성 프란치스코 성지들을 순례하며 최종적으로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도착하는 코스였습니다. 로마뿐 아니라 시칠리아 섬, 토리노, 피렌체, 밀라노, 페루지아 등 이탈리아 전역에서 같은 날 청년 프란치스칸들이 아시시를 향해 떠났습니다.
프로그램은 성인의 영성처럼 가난하고 단순하였습니다. 준비물은 배낭과 침낭과 돗자리뿐! 우리들은 각자의 준비물을 어깨에 걸머지고 개회미사 때 지도 신부님께서 목에 걸어주신, 프란치스칸의 상징인 T자 모양의 타우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 매일같이 걷고 또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각자 묵상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활짝 웃으며 ‘좋은 아침입니다.’,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며 아시시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웃으며 인사하는 순례길
우리는 젊은 시절 프란치스코가 좋은 옷감을 팔았다고 전해지는 폴리뇨(Foligno), 프란치스코가 새들에게 설교하였다는 베바냐(Bevagna), 그리고 아시시 다음으로 진정 최고의 프란치스칸 지역이라 불리는 거룩한 계곡인 리에티 계곡으로 들어가 폰테콜롬보, 그레치오, 포지오 부스토네, 라 포레스타의 네 개의 성지들을 순례하였습니다.
프란치스칸들에게 시나이라 불리는 폰테콜롬보(Fontecolombo)에서 성인은 네 번에 걸쳐 회칙을 쓰셨고, 지독한 눈병으로 고생하셨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곳에서 뜨거운 쇠를 달구어 눈 수술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불 형제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너무 강도를 세게 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셨고, 수술 후에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우리 그룹에 안드레아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맹인이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눈 치료를 받으셨던 그 공간에서 안드레아가 성 프란치스코의 조각상을 두 손으로 만지며 간절하게 기도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성인이 성탄의 신비를 재현하셨다던 그레치오(Greccio)에 도착한 우리는 강생의 신비와 관련하여 진정 작아지고 낮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나는 어떤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지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도보순례 첫날 그 씩씩했던 발걸음에 힘이 빠지고 배낭이 무겁게 느껴질 즈음, 우리는 포지오 부스토네(Poggio Bustone)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마을에서 저는 유명한(?) 자매가 되었습니다. 시골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동양인이 아주 낯선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엄마, 아빠에게 달려가서, 동양 여자와 인사를 나눴다고 자랑하고, 서로 수근수근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곳 마을 광장에서 젊은 프란치스칸들은 마을 주민들을 위해 즉흥 무대를 만들었고, 연극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 다시 걷고 또 걸어서 우리는 포도를 도둑맞아 포도주 생산을 고민하고 있는 사제에게 기적을 베풀었다는 라 포레스타(La Foresta)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은 마약에 중독되었던 젊은이들이 손일을 하면서 중독에서 해방되도록 도와주는 곳이었습니다. 마약중독자들이 스스로 찾아와 새로운 삶을 다짐하며 프란치스코처럼 육체의 한가함을 피하고자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고된 일들을 스스로 청하며 중독을 극복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또한 우리가 도착한 날은 미리 알고 새벽부터 빵을 반죽하고 직접 구워서 우리에게 빵을 제공해 주었는데, 이탈리아에서의 길고 긴 9년간의 유학시절 동안 그렇게 정이 가득하고, 맛있는 빵을 먹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기쁨에 찬 가난
그렇게 계속 길을 걸어 우리는 드디어 아시시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아시시 성모 마리아 대성당 광장에는 먼저 도착한 다른 지역 형제자매들로 가득하였습니다. 광장 입구에 도착한 우리들은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향해 환호하며 광장으로 입장하였고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서로 악수하고 안아주며 작열하는 이탈리아 태양보다 더 뜨거운 형제애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아시시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2천여 명의 젊은 프란치스칸들로 가득하였고, 전대사가 행해지는 포르치운쿨라 성당으로 손을 잡고 경건한 마음으로 입장하여 함께 기도하며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아시시는 성 프란치스코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열기로 가득한 축제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순례에는 저처럼 처음 참여한 이들도 있었고 두 번 이상 많게는 다섯 번 참석한 형제자매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덥고 힘들 때 도대체 왜 이런 순례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이 고된 여정으로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하고 궁금했었는데 그것은 아시시에 도착함과 동시에 해소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에 찬 가난이었습니다! 각자의 사고방식과 문화 등의 차이로 다가온 불편함에 자신을 열어놓고, 가난한 마음으로 형제자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우리는 함께 걸었습니다. 그 어떤 이도 뛰어나게 빨리 걷거나, 뒤처진 이를 비난하지도 않았고, 그냥 그렇게 함께 걸었습니다. 형제의 짐이 무거우면 서로 나눠서 들어주고, 함께 수도원 회랑에서 학교 교실에서 체육관에서 그늘진 나무 밑에서 돗자리를 펼쳐놓고 하루의 피곤을 풀었습니다.
프란치스코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도보순례에서는 가난과 기쁨이 동전의 앞뒤 면처럼 하나가 됩니다. 순례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과 행동 방식과 방향을 정하며,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의 길입니다. 프란치스코처럼 순례자와 나그네처럼 자신을 열어놓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오신 예수님과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를 아버지께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모범을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로 따라가기를 열망했던 열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시작했던 순례를 저는 오늘도 합니다. 오늘도 걷고, 또 걷고, 내일에도 다시 걸어갈 것입니다. 진리의 광채를 향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안선희 데레사 -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이며, 재속 프란치스코회 국제 번역위원회에서 이탈리아어 번역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