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12>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하)
창조, 구원은 하느님 사랑, 계획 안에서 완성
지난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발타사르는 역사가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완성되고 절정에 달한다며 그리스도 중심으로 역사를 새롭게 해석했다. 그는
또 십자가 신학을 전개하면서 십자가 사건이 위에서의 개입,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개입이기에 역사를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을 중심으로 해석할 것을 주문하면서 역사를 '하느님의 드라마'(Theodrama)로 제시했다. 발타사르의 이런 역사 해석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보자.
내재적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적 생명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를 알기
위해선 우선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를 규정해야 한다.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는 이
세상의 구원역사 안에서 계시되고 나타난 삼위일체 하느님 모습을 뜻하는데 통상 '경륜'이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내재적 삼위일체는 영원에서 이뤄지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적인 생명의 신비 자체를 의미하는데 '신학'이라고
한다.
발타사르는 오직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서만 내재적 삼위일체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며 후자가 항상 전자보다 앞서고, 전자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봤다. 내재적 삼위일체가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를 가능하게 하고 또한 구원역사 전체를 깊이 밝혀준다는 것이다.
발타사르는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강조하기 위해 칼 라너의 입장을 비판했다. 라너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신비로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구별하지 않고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 당신 자신을 세상에 전달하고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타사르는 라너의 이런 입장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라너는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 결과 내재적 삼위일체가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에 흡수돼 하느님 본질 자체가 세상 역사에 휩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타사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를 서로 명확하게 구별하고, 내재적 삼위일체를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뿐만 아니라 모든 구원 사건과 세상 역사 전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내재적 삼위일체가 없다면, 구원경륜적 삼위일체가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라너와 발타사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신학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너의 신학적 사고는 '아래에서 위로' 곧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향해
움직인다. 그의 신학적 기반은 '아래', 이 세상에 실존하는 인간이다. 그는 인간 중심적 신학을 전개한다. 이에 반해 발타사르의 신학적 사고는 '위에서 아래로' 곧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로 향한다. 발타사르의
신학적 기반은 '하늘'이며 이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뜻한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 중심적으로 풀어나간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역사의 근원과 마지막
그러면 발타사르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계시된 내재적 삼위일체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그는 삼위일체로서 하느님의
본질을 사랑 자체로 제시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변화 없이 경직된 하느님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께서 위격적으로 사랑을 나누시는 '삼위일체적인 사건', 영원히 계속되는 '사랑의 사건'이다.
하느님 본질이 사랑으로
구체화될 정도로 세 위격은 생생하게 사랑을 나누는 영원한 움직임, 역동적인 사랑의 사건이다. 발타사르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신약 성경 내용을 성부의 창조적인 사랑, 성자의 감사하는 사랑, 이
두 위격의 사랑 교환으로 탄생한 성령으로 이해했다. 이처럼 절대적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선 항상
사랑을 나누시기에 보다 위대한 분이며, 유한한 인간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크신 분이다.
발타사르가 묘사하는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절대적 사랑은 세 위격들의 절대적
자기 비움으로 이뤄진다. 이 사랑의 사건에서 세 위격들은 타 위격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삼위일체적 사건이 하느님의 영원한 운동이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랑 자체로서 영원히 완전하시다. 그분은 스스로 충만하시며 하느님으로 존재하기 위해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둘째, 하느님 사랑은 그 본질상 폐쇄되지 않고 자기를 넘어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향해 내려오시는 '위에서 아래로의 운동'이 일어난다. 발타사르는 이를 인식 이론적으로 '하강하는 논리'로 부른다. 곧 아래로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자기운동 덕분에 인간이
하느님을 인식하거나 하느님께 다가서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처럼 발타사르가 근본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바는 세상과 인간 그 모든 것을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이
절대적이며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사랑의 사건은 세상의 시작이며 종말이다. 세상과 인간은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사랑에서 유래하며, 그 역사도
하느님 사랑으로 지속돼 결국 완성된다.
하느님 안에는 이미 절대적
자기포기의 사랑과 항상 자기를 헌신하는 사랑이 있기에 그 사랑으로 세상은 창조되고 구원된다. 사랑을
도외시한 채 세상과 그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발타사르의 이런 시각은 현대에 이르면서 점점 잊히는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을 생생하게 강조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사실 하느님 사랑은 세상과 인간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근본 토대며, 또 인간이 마지막까지 간직할 수 있는 희망이기도 하다.
역사, 하느님의 드라마
이제 발타사르가 제시하는 '하느님의 드라마'인 역사를 살펴보자. 세계 역사는 하느님의 내적 역사로부터 이뤄진다. 하느님에 의해 이뤄는
사건, 하느님 자신 안에서 생성되는 사건이다. 하느님 본질은
삼위일체로서 충만한 사랑 안에서 영원한 움직임, 생명이 넘치는 존재,
타자에게로 향하는 존재다. 이런 삼위일체 하느님은 역사의 기초다.
역사 자체는 그 기초에
상응해 삼위일체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사랑의 대화를 통해서 마침내 세상 창조를
결정하고, 세상을 떠맡으신다. 이런 내재적 삼위일체의 대화에
따라 세상의 윤곽을 스케치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사건은 세상에 의미와 형식을 주는 원리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낳으실
때 세상을 원하시고, 성자에게 세상을 선물로 넘겨주신다. 성자께서는
이런 선물을 순종으로 받아들여, 역사의 이념과 세상의 원형이 되신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세상에 대한 의지를 보편화시키신다. 창조로 시작해 강생을 넘어
십자가 사건에까지 이르는 역사의 모든 움직임은 이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서 미리 결정된다.
이렇게 역사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미리 결정되고 또 그 사랑으로 실행된 드라마라면 '어떻게 죄악이 역사에 나타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죄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충만한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당신 사랑의 선물로 세상에 자유를 주는 모험을 감행하신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로 죄를 범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늘 함께하시고, 위급한
경우 십자가 비움을 통해서 인간을 되찾을 준비를 할 정도로 인간의 자유를 감싸셨다.
그 결과 인간은 협력자로
하느님 드라마에 등장한다. 이 드라마의 핵심 인물은 하느님과 인간이다.
곧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으로 행동하시고, 인간은 그 사랑에 대해 자유를 통해 응답한다. 여기에서 인간은 창조와 함께 주어진 세상의 구체적 모습을 거부할 수 있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긍정적인 분리'를 인정하는 것도 거부할 수 있다. 하느님과 인간의 실제적 분리는 신적 위격들 사이의 실제적 분리에 기초한다. 세상은
하느님과 분명하게 분리되지만 뗄 수 없이 그분과 깊이 결합돼 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통해서만 세상은
자기의 실제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을 지킬 수 있다. 이에 비해 죄는 하느님과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피조물이 자기 자유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의 거룩한 분리
안에 자리잡은 죄
하지만 이런 죄의 가능성은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놓여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죄악을 원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발타사르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조건 없이 사랑하시지만, 이 사랑에
직면한 인간이 이유 없이 거부한다고 자주 말한다. 그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죄는 성령 안에서 이뤄지는
성부와 성자의 거룩한 분리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거룩한 분리에서 모든 죄가 회복되고
극복될 수 있다. 그러니까 창조와 구원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둔다.
여기에서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을 엿볼 수 있다. 창조가 십자가 사건에서 완성되고 그 충만한 의미를 지닌다면, 창조는 십자가 표지 아래 있다. 이것은 구원 사건이 근본적으로 창조와
더불어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 계획돼 있다는 것을 뜻한다. 세상에 파견돼 인류를 구원한 성자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이미 성부의 뜻을 성령 안에서 실행하려 준비하고 계신다.
하느님에게 구원은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계획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발타사르는 예수님께서 세상이 창조 이전에 이미 살해된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며, 인간은 창조된 존재이기 이전에 먼저 구원된 존재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