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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9-26 11:26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11>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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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정건석
    조회 : 3,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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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11>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역사의 중심인 십자가 사건, 삼위일체 주님 사랑의 표현

 

발타사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규범과 기준으로 제시한 다음, 역사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발타사르는 역사를 그리스도교 이전의 역사, 예수의 시대, 역사의 완성인 십자가 사건으로 나눴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역사는 '하느님의 오랜 인내의 시간'으로 또 다시 두 부분, 성경 밖의 역사와 구약이라고 부르는 성경의 역사로 구분된다. 발타사르는 성경 밖 역사에서 인류가 완성을 추구하며 문명 형성에 큰 도움을 받았던 세 가지 요소를 지적한다. 그것은 신화와 철학과 종교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역사, 하느님의 오랜 인내의 시간  

 

 신화에서 인간의 완성은 수직적 차원, '위로부터 빛의 개입'으로 이뤄진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신화는 인간과 세상을 오직 신들의 실재로부터 해석하고 파악하기에 환상에 머문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철학이 등장한다. 철학에서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비극적 한계를 벗어나 불멸을 얻으려고 시도하기에 구원은 존재 자체를 향한 열정(에로스)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철학은 초월적 이성이 도약하는 양식을 신과 인간의 차이를 망각할 정도로 그 유사성을 크게 받아들여, 기도와 예배가 없는 독백의 차원에 머문다.

 

 신화와 철학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종교가 나타나는데, 종교는 신화와 철학, 곧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에서 해석하는 신화적 종교(Vergil), 인간이 신에게 받은 사명을 순종으로 이행함으로써 구원이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가치를 자신의 비전(das Eine)으로 통합하는 철학적 종교(Plotin)는 구원을 하나의 신비로, 곧 신에게 온전히 참여하는 모습으로 제시한다.

 

 발타사르는 성경 밖 역사를 신화와 철학과 종교로 나눠 해석한 다음 성경의 역사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다. 이스라엘은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며 성경 밖 역사를 탁월하게 넘어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무조건적 사랑으로 선택됐고, 스스로 완성을 추구하고 시도한 성경 밖 역사와 달리 역사 안에서 하느님 구원의지를 체험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맺는 모든 관계를 위한 세계 역사적 모델이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특히 하느님과 인간의 긴밀한 관계를 잘 나타낸다. 하느님에게 선택받고 무조건적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제 그 응답으로 하느님만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부르실수록 그분에게서 멀어져 갔다(호세 11,2 참조). 하느님께선 이스라엘을 가까이 하려 많은 예언자를 보내셨고, 마침내 하느님 종의 모습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암시하신다. 결국 구약은 다가오는 구원자를 향하며 점점 메시아 기대 사상으로 충만해진다.

 

역사의 상승,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결과  

 

 그리스도교 이전의 역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을 발타사르는 이렇게 지적한다. 인류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과 무관하게 도도히 흐르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시간적으로 뒤늦게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미리부터 암시하고 있다. 역사를 수평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사건을 향해 점진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역사는 단계적으로(신화→철학→종교→구약) 상승하면서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이런 상승 운동은 역사 자체의 힘에 의한 것은 아니다. 역사가 자신의 힘으로 완성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역사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사건은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역사 운동의 결과물이 아닌데,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류 역사가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사의 상승 운동은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그리스도의 사건에 의해,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이 사건 안에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 신비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통해 성령 안에서 계시하신 인류를 향한 보편적 사랑은 인류 역사를 그 사랑 안으로 단계적으로 끌어당겼으며, 그렇기에 역사는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해 상승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발타사르의 역사관 한가운데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의 시간을 이해하려면 발타사르가 그리스도론의 해석학적 길잡이로 제시하는 '사명'의 개념을 살펴보아야 한다. 사명은 예수님 인격만이 아니라 그 행적에도 깊이 관련된다. 예수님께선 하느님께 받은 일정한 사명을 지니고 세상에 파견되신다. 예수님 안에서 인격과 사명은 절대적으로 하나가 된다. 예수님께서 사명을 지니고 이 세상에 파견되신 근본 이유는, 그분이 이미 영원 안에서 성부에게서 나시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의 사명은 영원에서 이뤄지는 성자 출현의 결과다.

 

예수님의 시간, 하느님께서 끌어당기시는 시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 전체를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기꺼이 그리고 의식적으로 완수하는 데 헌신하신다. 발타사르는 항상 예수님의 절대적 사명의식을 강조한다. 당신의 사명을 철저하게 의식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명을 철저히 의식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움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영원에서 성부와 성자를 중개하고 사랑으로 서로를 완전히 일치시키듯이, 구원역사 안에서도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계획을 예수님에게 전달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분명히 의식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

 

 이런 사명의식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시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예수님 시간은 수평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스라엘 구원역사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예수님 시간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생 동안 하느님 구원의지와 계획을 알리고 또한 직접 실현하는 사명을 철저하게 완수하셨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영원이 이 세상 시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예수님의 시간은 하느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 개입하신 시간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삶은 결국 하느님에 의해 결정된 때, 십자가 죽음의 순간을 향해 달려간다.

 

 이 죽음은 하느님 구원의지로 결정된 죽음이며 또한 궁극적으로 하느님 영광을 계시하는 죽음이기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순종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하느님의 구원계획으로 이뤄졌기에, 발타사르는 예수님 시간을 하느님께서 '끌어당기시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십자가 사건, 역사의 완성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분명 구원역사의 중심이다. 이 십자가에서 역사가 완성된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위한' 사건이다. 유한한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께선 인간의 죄를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심판한 사건이다. 이 십자가 사건에서 모든 사람의 죄가 낱낱이 밝혀진다.

 

 인간의 절망적 상황과 죽음이 십자가 사건에서 극복됐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발타사르는 세 가지로 든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을 죽음으로 이끈 모든 죄를 온전하게 심판하심으로써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께서 성금요일에 저승에 내려가시어 하느님에게서 이미 영원히 버림받았던 과거의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을 해방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버림받은 자들과 연대해 그들의 저주를 이겨내신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죽은 이들을 심연에서 일으키신다. 부활로 죽음을 극복, 구원을 결정적으로 선포하신다. 따라서 인류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됐다. 십자가는 과거와 현재의 실제적인 죄만이 아니라, 미래에 범할 수 있는 모든 죄까지도 받아들이고 이겨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타사르에게 역사는 십자가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발타사르는 이 완성 사건이 영원하신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세상과 화해하려는 성부의 의지가 성자의 사명 안에서 실현된다. 성자께서는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모두 완수하신다. 이런 구원활동에서 성령께서는 성부의 뜻을 성자에게 전달해 성부와 성자를 결합시키신다. 성부께서 세상 모든 죄를 당신 아들에게 짊어지게 하시는 그 희생적 사랑 안에서, 동시에 성자께서 성령 안에서 성부의 모든 뜻을 완수하는 동일한 희생적 사랑 안에서, 세상은 하느님과 결합하고 하나 된다.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부와 성자의 상호 희생적 사랑은 인간의 모든 죄악보다 더 강하고 더 힘이 세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일어난 구원과 완성의 사건인 십자가 사건이 단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면, 십자가는 결국 삼위일체의 신비를 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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