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9>칼 라너(하)
자신의 한계 넘어 하느님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고찰
라너는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때때로 그러한 질문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부하는 민감한 것이기도 했지만
라너는 이러한 도전을 피하지 않았다.
1968년에 반포된 윤리 회칙 「인간 생명」은 인공피임을 단죄했다. 라너는
교도권 입장을 존중했지만, 회칙이 개인의 양심적 결정을 더 존중했어야 한다고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다. 그렇다고 그가 자유로운 성문화와 피임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성문화에 대한 회칙의 강경한 입장은 정당한 것이라고 보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돼 심각한 문제였던 사제 독신제에 관해서도 라너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라너는 사제 독신제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신제를 없애면 사제직이 속물적이게 되는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론상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사제 독신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엔 강하게 반대했다. 진지한 실천 없이 모든 것을
이론적으로만 설명하려는 싸구려 성향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의 눈엔 사제 독신제를 폐지하자는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라너는 오히려 독신제를 '십자가의
우둔함'이라고 표현하며 옹호했다.
1970년 교황의 무류권 문제를 제기한 한스 큉(1928~ )을 향해
라너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큉은 계시된 진리와 이 진리를 교의적인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다. 인간 개념으로 규정된 것은 언제나 왜곡이 일어나기에 계시 진리를 온전히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교의적인 문장은 계시 진리라고 할 수 없기에 절대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나아가 교회 가르침을 보호하고 때론 교리를 선포하는 교황에겐 신앙에 대한 무오류성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미 인간의 사고로 개념화되는 순간 계시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교황이 정한 교의를 신자에게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신자들을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했다.
라너는 이러한 큉의 주장을
위험하게 여겼다. 큉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업적 즉, 하느님의 강생은 신자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생이
신자들에게 의미를 준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의 이해 방식과 능력에 상응해 이뤄진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라너는 진리에 대한 결정은 언제나 개념이나 문장을 통해 정리돼야 한다고 보았다.
교회가 하느님의 계시
진리를 이해하고 있고 그것을 참되게 전달할 수 있다는 데 반대한다면, 즉 하느님의 구원 진리에 대한
교회의 인식과 전달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모든 인간에게 향하는
하느님 계시가 의미 없고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류성의 거부는 결국
성경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오류 없이 하느님 말씀을 인지하고 바르게 기록했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기록한 성경이 계시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물론 언어를 통한 개념적
정리가 진리의 심연을 다 열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라너는 하느님의 계시 진리가 인간의 이해
능력을 멀리 뛰어넘어서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칼 라너 신학의 핵심은
초월론적 방법론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인간의 정신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을 추구하는 초월 행위를
숙고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라너는 경험되는 구체적 사물 또는 사건을 뛰어넘어 그 사건과 사물이
존재 가능하도록 하는 전제인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을 고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의 출발점은
인간에 대한 이해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 내의 정신'이다. 세계
내에서 정신적 존재로 자신을 성취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그 안에서 타인들과 '함께 하는 존재'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제한성을 벗어나 궁극적인 존재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자이며 참된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묻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자기 스스로에서 오지 않고 타자로부터 선사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 한계를 넘어선 무한한 그 어떤 존재, 세상의
모든 존재를 허락하는 알 수 없는 어떠한 절대자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이분이 곧 하느님이다.
모든 존재자에게 그 존재를
허락하고 빛을 비추는 최종 근거, 즉 하느님은 인간에게 무한한 현실이자 무한한 지평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은 현실이지만 무한하기에 인간에게는 신비로 다가온다. 절대자
하느님은 무한한 존재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의 인식능력에 상응해 진리의 빛을 비추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해부하듯이
사물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래서 하느님의 무한한 현실은 인간에겐 신비로운 존재이자 그 심연을 알
수 없는 존재다. 이러한 이유로 하느님은 인간의 궁극적 질문조차도 삼켜버리는 어두운 심연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하느님 존재는 결국 모든 존재자들의 의미를 부여하는 무한의 현실이고 세계와 인간의 궁극적 기원이
되는 절대적 신비인 것이다.
칼 라너의 신학은 가톨릭교회의
전통 신학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신학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제기되는 질문에
새로운 답을 내놓으려 했다. 그는 교회의 권위적 방법론을 탈피하고 '아래에서
위로'라는 인간중심의 신학을 전개했다. 그의 인간 이해의
핵심은 하느님을 찾아 자신을 끊임없이 초월하는 인간이다.
이를 위해 라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과 임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의 통합을 시도한 요셉 마레샬의 철학을 수용했다. 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인간 이해를 제공한 마틴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을 수용하기도 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질문은 구체적으로 현시점을 살아가는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히 사물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현존재라고 했다.
인간은 제한돼 있음에도
무한한 현실인 하느님에 대해 무한히 개방된 존재다. 인간은 무한한 신비인 하느님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을
성취해 나아간다. 이러한 가운데 인간은 더욱 자유로워지며 더욱 책임 있는 존재로 성장한다. 인간은 무한한 현실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가졌고, 역사 내에서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경험하는 인간은 자신이 사는 세상을 하느님의
사랑에 상응해 구성하도록 노력한다.
1984년 초 칼 라너는 매우 바쁜 시기를 보냈다. 2월 11~12일 프라이부르크대교구 가톨릭 학술원에서 '하느님의 신비 앞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주제로 강연했고, 며칠 지난 2월 17일 런던에서 강연한 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와 대화'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것이 라너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었다.
2월 22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한 그는 3월 5일 인스브루크 공동체에서 생일
축하연을 가졌다. 그 이후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을 일으켜 코피를 흘렸다.
3월 9일 입원한 그는 중간에 회복하는 듯 했지만 상태가 악화돼 3월 30일 밤 11시 26분에 선종했다. 그는 4월 4일 인스브루크 예수회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연구는 근대주의
개념을 긍정적으로 수용해 근대주의 도전을 극복하려 한 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자신의 신학으로 인간을
강조함으로써 현대 신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그는 인격의 세 가지 특징을 잘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는 '본연성', 자신의 주인이 되는 '주체성',
그리고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되지 못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독자성'이 그것이다.
물론 라너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격적인 하느님의 무한성과 독자성 그리고 주체성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제한적이라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라너의 신학적 기획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라너는 자신의 신학을
통해 인간의 인간됨을 영성적이자 체계적으로 그리고 사목적인 목적을 가지고 수행했다.
그에게 인간은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그리고 절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자유롭게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면에서 주체적인 존재다. 그리고 인간이 주체적인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