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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9-06 07:00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4>주님의 종, 로마노 과르디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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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정건석
    조회 : 3,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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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학문 넘나들며 그리스도 신앙이 지닌 희망 전파

 

   1968 10 1일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 1885~1968) 83세로 지인들 기도 속에 영원히 잠들었다. 다음날 지인들이 모여 그의 부고 문구에 어떤 호칭을 사용할지 논의했다. 그는 가톨릭 사제, 대학교수, 신학자, 종교철학자, 교육자, 청년운동 지도자, 전례개혁자였다. 하지만 그 어느 호칭도 그의 활동과 인물됨을 모두 담아낼 수 없었다. 오랜 논의 끝에 지인들은 '로마노 과르디니-주님의 종(Diener des Herrn)'으로 결정했다. 한평생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받들어 모시며 살았던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과르디니는 교의신학을 전공한 신학자이지만 대학에서 30여 년을 '그리스도교 세계관'이라는 독특한 강좌를 통해 학생들을 만났다. 그의 강좌는 특정한 전공분야에 매이지 않았기에, 신학과 철학 그리고 문학 등 다양한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교회 신앙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고찰, 그리고 올바른 삶을 위한 조언을 학생들과 나눌 수 있었다. 구체적 현실에서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신학과 영성은 분리돼 있지 않고 오히려 생생한 일치를 이뤄야 함을 늘 강조했고, 그리스도 신앙이 세상에서 지니는 희망의 근거를 증언함으로써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전후해 교회 쇄신에 크게 기여했다.

 

이탈리아 이름을 지닌 독일인

 

과르디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이탈리아 북부 베로나에서 1885 2 17일 네 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이듬 해 아버지가 독일 마인츠에 가금(家禽)류 수입회사를 설립하면서 가족 모두가 이주해 그는 독일에서 성장하고 공부하고 독일인으로 살게 될 운명이었다. 집에서는 이탈리아어만 사용하는 등 철저하게 이탈리아 문화 속에서 생활했지만, 독일 학교를 다니면서 독일 언어와 정신세계에 동화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유럽인으로 성장했다.

 

 그는 재주가 많았지만 학교에선 조용한 학생이었다. 어머니를 닮아 조금은 우울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일생을 두고 바뀌지 않았다. 1903년 인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튀빙엔대에 진학해 화학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1년 뒤 국민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꿔 뮌헨대로 갔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를린대로 옮기는 등 대학생활 초기에 무엇을 전공해야 할지 몰라 방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황을 끝내고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이듬 해엔 다시 튀빙엔대로 옮겨 1908년 여름학기까지 신학공부를 계속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선 신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마인츠교구 신학교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신학교 교육에 비판적 발언을 했다가, 어린 시절부터 단짝 친구였던 카를 노인되르퍼(1885~1926)와 함께 반 년간 서품이 보류돼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마음으로 함께해준 이웃들의 도움으로 이 시기를 잘 극복하고 1910 5 28일 마인츠주교좌성당에서 키르스타인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됐다. 수품 후 2년 동안 보좌신부 생활을 했고, 1911년 부모 반대에도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

 

 과르디니는 어린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회고하기도 했는데, 그는 남녀노소를 모두 아우르고 돌봐야 하는 일반적 사목보다는 젊은이들에 대한 사목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보좌신부로 지낸 그는 1912년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로 갔다. 2년 후 그는 엥엘베르트 크렙스 교수 지도로 '성 보나벤투라의 구원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학교 교수를 꿈꾼 청년 사제

 

그는 신학교 교수직을 내심 기대했지만 다시 마인츠의 한 성당에 보좌신부로 발령받았다. 그곳에서 6년간 지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의무부대에서 행정직으로도 근무했다(1916~1918). 이 시기 그가 맡았던 일이 하나 더 있다. 1915년부터 1920년까지 '유벤투스'라는 이름의 학생연합회를 담당했다. 이 소임 역시 향후 마인츠 신학교 교수직을 약속받고 수락한 것이었는데, 결국 교수가 되지 못해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자신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인사를 집행하는 고위직 인사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던 듯하다.

 

 그는 숨통을 죄는 듯한 마인츠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교수자격 취득을 이유로 교구에 휴직 신청을 냈는데 뜻밖에 교구에서 쉽게 허락을 해줬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1919) 남은 가족이 모두 이탈리아로 돌아가면서 그 역시 미련 없이 마인츠 생활을 정리하고 본으로 갈 수 있었다. 본대학에서 게르하르트 에써 교수 지도를 받아 1922 '보나벤투라 신학에 내재하는 체계구성요소'라는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얻고 본대학에서 교의신학 강사로 봉직하게 됐다. 이 시기에 그는 막스 셸러, 마르틴 부버, 그리고 오도 카젤 아빠스 등과 교류했다.

 

 그가 박사학위 논문과 교수자격 취득 논문 주제로 모두 '보나벤투라'를 선택한 것은 당시 지배적이던 신()스콜라 신학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아우구스티노와 플라톤 철학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당시 신학은 신스콜라 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전개됐기에 그는 비주류 노선을 선택한 것이다.

 

 직관과 이성, 경험과 학문, 그리고 감성과 논리적 명징성은 상호 긴장과 연관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데, 과르디니는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살아 있고 구체적인' 것의 현상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구체적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로부터 보이지 않는 본질을 찾아 개념화하는 노력이 그의 학문적 방법론의 요점이다.

 

 과르디니는 이 시기에 그를 교회 안팎에서 소위 '스타'로 만들어 준 책들을 집필하는데, 이를 통해서 그의 독특한 교회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대부분 저서들이 그러하듯 이 책들도 강의 원고를 모아 정리한 것이다.

 

  전례와 교회를 사랑하며 섬긴 과르디니

 

첫 번째 책은 「전례의 정신」(Vom Geist der Liturgie, 1918)이다. 과르디니는 마인츠에서 보좌신부를 하던 때에 전례란 무엇인지에 관해 강의한 적이 있다. 이 원고가 마리아 라아흐 수도원의 일데폰스 헤르베겐 아빠스에게 소개돼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수도원에서는 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전례에 관한 총서 「기도하는 교회」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과르디니 책이 이 총서의 첫째 권으로 선정됐다. 그는 전례야말로 교회 공동체 기도로서 어떠한 목적없이 오로지 하느님 영광을 바라보고 찬양하는 놀이임을 강조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1999년 펴낸 저서 「전례의 정신」 제목이 과르디니 책과 연관돼 있음을 분명히 언급한 바 있다. 80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두고 있지만 교회생활에서 전례의 중요성과 전례의 올바른 거행에 대한 두 학자의 관심과 열정은 다르지 않다. 과르디니는 전례와 관련해서 「전례교육」(1923), 「거룩한 표징」(장익 역, 분도출판사), 「의지와 진리」(1933), 「미사, 제대로 드리기」(김영국 역, 가톨릭대학교출판부) 등의 책을 저술했다.

 

 두 번째 책 역시 1922년 가톨릭 대학인 모임에서 발표한 강연을 모은 것으로 「교회의 의미」(Vom Sinn der Kirche, 1922). 이를 계기로 그는 1923년 베를린대에 새로 개설된 '가톨릭 세계관' 강의를 맡게 됐다. "교회가 신자들 안에서 깨어난다!"(Die Kirche erwacht in den Seelen!)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교회가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구속하는 감독 기관이 아니라, 개별 신자들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인간의 삶 전체에 온전한 자유를 보장한다고 강조한다. 교회는 신자들과 마주하는 무엇이 아니라, 신자들과 한 몸을 이루는 신비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특강을 통해 자신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관한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그는 이 무렵 교수자격 취득 과정을 마쳤지만, 학문적 신학 연구보다는 그리스도교 현실을 지성인 수준에서 해석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교회에 관한 그의 책이 종파를 초월해 많은 지성인에게 감동을 줬던 것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모든 것이 붕괴된 상황에서 다른 종파나 이념과 달리 흔들림 없는 지속성을 보여준 가톨릭교회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에 대한 그의 사랑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과르디니는 80세가 되던 해에 교회에 관한 묵상서 「주님의 교회」(Die Kirche des Herrn, 1965)를 출간하며 교황 요한 23세에게 이 책을 헌정했다.

 

 서문에서 그는 그가 30대 중반에 저술한 「교회의 의미」(1922)를 언급하면서 두 책이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있다고 했다. 두 책은 시대적 배경이 다르고 강조한 바가 다르지만, 그가 청년시절부터 보여 준 교회에 관한 열정과 사랑, 공동체로서 교회의 본질과 기원,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담고 있다.

 

 

 

   김영국 신부

   1977년 수품(서울대교구)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 교의신학 전공, 신학석사

 ▲1994~2011년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수, 원감

 ▲2002~2009년 서울대교구 청소년국장

 ▲2009~현재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

 ▲주요 논문 : 로마노 과르디니-신학과 신앙의 삶의 일체성(1995), 로마노 과르디니-성서 해석의 기본정신(1997), 어린이 미사에 대한 사목적 전망(2004), 본당사목의 기초로서의 주일사목(2006)

 ▲번역서 : 「미사, 제대로 드리기」(가톨릭대학교출판부), 「예비기도학교」(가톨릭대학교출판부), 「기도와 진리」(기쁜소식), 「트렌트/1차 바티칸공의회」(보편공의회문헌집,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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