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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10 07:23
   신앙의 기회비용(마태 10, 34-11,1) -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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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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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721

2016년 7월11일 월요일 

신앙의 기회비용(마태 10, 34-11,1)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 39)

오늘은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먼저 분도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먼저 굿뉴스 성인전에서 소개하고 있는 분도 성인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또는 베네딕토)는 480년경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는 로마(Roma)에서 수학하였으나 도시생활의 혼란과 방종이 그로 하여금 광야로 가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500년경에 그는 그곳에서 30마일 떨어진 엔피데로 갔다가 은수자의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수비아코(Subiaco)에 정착하였다. 

여기서 그는 3년 동안을 동굴에서 살았는데, 로마누스(Romanus)라는 은수자에 의하여 음식을 공급받았다. 독수자가 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덕과 엄격함이 널리 알려져서, 그는 비코바로(Vicovaro)에 있는 한 수도자의 공동체로부터 그들의 원장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수락하였으나, 그들이 그의 엄격한 규칙에 반대하여 마침내 그를 독살하려고 시도하자 수비아코로 되돌아왔다. 그 후 곧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자신이 임명한 원장의 지도하에 있는 12개의 수도원을 조직하고 일과표의 일부로서 노동을 실시하였다. 수비아코는 영성과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인근의 본당사제이던 플로렌티우스가 자신의 활동을 시기해 죽이려 하자, 다른 수도자들의 안전을 위해 그곳을 떠나 529년경에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아폴로에게 헌정된 이방인 신전을 파괴하고 인근의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으며, 530년경에는 서방 수도원의 발생지가 되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의 성덕과 지혜 그리고 기적에 대한 명성이 수없이 퍼져나가 또다시 많은 제자들이 몰려왔다. 

그는 수도자들을 단일 수도원 공동체로 조직하고, 상식을 존중하면서도 올바른 금욕생활, 기도, 공부 그리고 일 및 한 명의 원장 아래 있는 공동체 생활을 규정하는 저 유명한 규칙을 썼다. 이 규칙은 순종과 정주 그리고 신심을 강조하였으며,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수도자들을 지도하면서도 통치자와 교황의 고문을 담당하였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도틸라의 침공으로 황폐해진 롬바르디아(Lombardia)를 재건하는데 정열을 쏟았다. 

그는 547년경 3월 21일 몬테카시노에서 선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8세기 말부터 여러 지방에서 7월 11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해 왔다. 성 베네딕투스는 1964년 10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하여 유럽 전체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의 문장은 깨어진 컵, 까마귀, 종, 아바스 문장 그리고 숲이다.”

기회비용이란 말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함으로써 포기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회비용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기회비용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전가하면 살아가는 극도의 이기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 들은 모든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비용과 수익을 생각할 때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보이는 것을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저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선택하기 위해서 비움의 아픔을 비용으로 지불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택에는 포기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해서 세상이 주는 기쁨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포기의 아픔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평화의 사도가 아닌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으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고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주러 오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우리에게는 갈등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비우고자 하는 마음과 채우고자 하는 마음의 갈등,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과 낮아지고자 하는 마음’ 이러한 대립적인 것을 눈 앞에 두고서 당연히 싸우게 될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이러한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친구 사이에도 당연히 가치관이나 종교관의 차이로 대립이나 긴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립이나 갈등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오신 분으로 보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장 6절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평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에 평화를 주러오신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것처럼 보여지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진실을 부정합니다. 

인간은 진실을 두고서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인간에게 만이 일어날 수 있는 분열입니다. 자신의 이해가 진실임을 알면서도 진실을 부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생각해 봅니다.  먼저 요한 복음 3장 16에서 17절을 봅니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6-17)라고 합니다.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첫째 목적은 당신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려는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그외에도 마태오 복음 1, 21절을 보면, 요셉의 꿈 속에서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1:21)라고 하는 천사의 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루카복음 19장 1에서 10절을 보면 , 자캐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자캐오는 거리를 지나가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지만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린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 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캐오를 보시고 오늘 그의 집에 머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마도 그의 노력을 가련하게 생각하셨나 봅니다. 어쨌던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머무르시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다고 투덜댑니다. 그때에 자캐오는 말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 8)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하고 말씀십니다.

자캐오와 예수님의 대화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죄인을 찾아주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분의 찾아오심에 정성을 다하여 대접하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는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이 있고 이를 부정하고 타인의 죄를 보고 자신의 죄를 덮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당신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르1:38-39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하시고는 온 갈릴래아에 다니시며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이 당신을 찾아오기도 하지만 당신 스스로 당신을 필요료하는 사람을 찾아 나서시는 것을 보게됩니다.   따라서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 역시 잃어버려진 채 있는 이들을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분열과 대립, 그리고 포기와 갈등과 같은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참 평화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댓가인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우리의 목숨마저도 이를 위해서 내어 놓아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서 우리는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 39)는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평화를 위해서 칼을 당연하게 감수하는 삶, 이를 위해서 내어 놓아야 하는 목숨을 내어 놓음으로 영원한 삶을 얻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 한번 분도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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