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144
2014년 8월 21일 목요일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36, 28)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 14)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로 오라고 초대하시는 분으로 다가옵니다. 어린 아이를 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부릅니다. 하지만 아이는 어머니가 자신을 오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정도 성장하여 어머니가 자신을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앞에 무엇이 있든 보지 않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부딪히기도 합니다. 자신 앞에 무엇이 있든 상관하지 않고 어머니만 보고 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젖뗀 아이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다윗은 시편 131편에서 자신을 두고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신의 마음은 오만하지 않고 자신의 눈은 높이 않고 자신은 거창한 것을 따라 나서지도 주제넘게 놀라운 것을 찾아 나서지도 않는다고 합니다.(시편 131,1) 그러면서 자신은 어미 품에 안긴 젖뗀아기 같다(131, 2)고 말합니다.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것은 어머니의 젖을 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이가 젖을 떼기 전에는 어머니를 찾을 때 젖 때문에 엄마의 품을 찾지만 젖을 뗀 아아가 엄마의 품을 찾는 것은 그 어머니의 품이 너무나 따뜻하고 품 안에서 참 평화와 행복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품에 안기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높이가 높지 않아야 합니다. 주제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만은 아이가 어머니의 품을 떠나게 합니다. 어머니의 품안에서 느끼는 행복과 평화를 거부하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삶에서 떠나야 했던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초대를 받고서도 이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습니다. 혼인잔치의 비유입니다. 이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고서도 응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복음서에서는 처음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응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초대 받은 이들이 이 초대에 응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마태 22, 5-6)고 합니다. 이들이 이 초대에 응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일들을 하늘나라보다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자신들을 초대하기 위해서 심부름을 온 사람들을 때려서 죽이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일과 세상적인 일이 겹치게될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느님의 일을 놓습니다. 세상적인 일의 포기는 지금 이 순간 눈에 보이는 결과를 초래하지만 하느님의 일의 포기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고 눈을 뜨지 않으면 볼 수 없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귀찮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포기하거나 냉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완전하 평화와 행복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음으로서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우리의 하느님이 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