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143
2014년 8월 20일 수요일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일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에제 34, 2)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 16)
오늘 나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은 착한목자의 모습입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착한 목자 대해서 요한 복음 10장은 말합니다. 그리고 시편 23장은 목자가 자신의 양들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양들을 이용하는 악한 목자들을 우리 주변에서 자주 발견합니다.
교황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위로가 없는 사회에 위로를 주고 가셨다고 합니다. 소통이 없는 사회에 참 소통이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참된 지도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나를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자신의 삶으로 삶의 현장에서 보여주시는 교황님의 모습을 통해서 위로와 평화를 얻습니다.
어떤 개신교의 목사님께서 이번 교황님의 방한을 비판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스스로는 남의 종교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교황님의 방한으로 교황님께서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교황님만 보인다.”하고 비판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교황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보이는데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을 통해서도 교황님만 보이나 봅니다. 보고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질투와 시기는 이렇게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아버립니다. 우리도 이들과 같이 되지 않을려면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주고가신 메시지의 그 참된 의미들을 깨닫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언론은 밝음보다는 어둠을 먼저 보도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보이는 세상은 어둠이 꽉찬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소리없이 자신의 본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삶이 이 세상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옳음을 소리높여 외치는 사람들보다는 이렇게 소리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심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비교의 정의가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원래의 창조된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주인과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으로 정했으면 그것에 만족하면 되는데 우리는 그 계약을 넘어서 남은 어떠한 계약으로 얼마나 받는가에 관심을 둡니다. 이러한 비교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어 감을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뱀의 유혹에 빠지는 것에서부터 지금까지 진행되어 옴을 봅니다.
주변의 많은 분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하고 소개합니다.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이 새로 신자가 된 사람들을 두고 판단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도 오래된 햇수만큼에 상응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오히려 오랜기간의 믿음의 생활이 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지 오래된 것이 자신보다 나중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모태신앙이 못해신앙으로 변질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교만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진지 오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의 축복속에서 살아왔다는 것과 다를바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받고 못받음은 자신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그만큼 축복의 생활이 늦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분들의 신앙생활을 도와 주는 것이 오랜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더욱 이해가 빠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고 신앙생활은 오래하면 할수록 겸손의 덕이 쌓여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보수를 주더라도 만족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