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139
2014년 8월 15일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5)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모든 분들께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 본명을 가지신 모든 분들께도 축하를 드립니다. 오늘 교황님께서는 성모승천 대축일 미사를 대전에서 봉헌하시겠지요. 이같이 특별한 날 교황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신 것은 우리 교회와 우리 민족에게는 큰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황님을 통해서 특별히 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작금의 한국사회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오늘의 복음은 우리들에게 신약의 두 대표적인 여인들의 만남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신약과 구약의 여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희망과 좌절의 역사를 천국과 지옥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체험들을 우리들은 이들을 통해서 체험하게 됩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여인 세분을 생각해 봅니다. 하와와 엘리사벳과 성모님입니다. 이 세분은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양하게 만나게 되는 대표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하와는 인간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면 타락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신약의 두 여인은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순명과 믿음 그리고 희생적인 삶을 살아간 여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들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와는 욕심이 많은 여인입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그러하기에 유혹에 쉽제 넘어가는 여인입니다. 자신의 그러한 욕심이 결국은 자신의 남편마저도 파멸의 길로 인도합니다. 이들의 욕심과 교만이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 이끌어갑니다.
엘리사벳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을 잉태합니다. 엘리사벳을 통해서 태어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더욱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최고로 교만할 수 있는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믿음과 겸손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을 봅니다. 성모님은 믿음과 순명으로 예수님을 잉태합니다. 인간 구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참 어머니의 모습을, 참 신앙인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게 해 줍니다. 성모님에 대해서 오늘 복음이 전하는 몇가지의 특성을 살펴봅니다.
먼저, 45절은 성모님의 첫 번째 특징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존재’ 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성령으로 잉태한다고 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하느님의 말씀대로 이루지기를 원한다고 말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성모님의 이러한 믿음과 순명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큰 기여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믿으셨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엘리사벳이 말합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명의 역사가 하느님이 주신 구원의 역사가 있게 한 것입니다.
둘째는 찬양하는 여인이었습니다. 46-47 을 보면, 자기 자신이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임을 깨닫으면서도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찬양은 자신의 비천함을 알 때 하게 됩니다. 정말로 찬양을 가슴으로 하는 사람은 자신의 비천함, 연약함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비천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은 축복입니다. 은혜를 깨닫는 첫번째 길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향해서 당당한 여인이었습니다.
세째는, 48절 “그분께서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을 보면, 자기가 비천한 존재이지만 하느님께서 복이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49-50절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즉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속성을 아는 분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둘을 알면 신앙의 모든 내용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를 애통하게 하고 하느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하느니믜 공의와 사랑의 속성을 깨달은 여인이기도 합니다.
다섯 번째로 하느님의 계시의 신비를 알고 있었습니다. 행복한 여인, 하느님의 속성을 깨달은 여인, 하느님의 계시의 신비를 가슴에 담고 있는 여인, 우리의 인생에 기쁨을 줍니다. 내 안에 있는 이 계시의 신비는 하느님의 속성을 알고 감사해야 하고 구원의 역사를 그가 알고 있습니다.
51-53절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높이셨으며”까지는 하느님의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사의 불공평성을 인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불공평성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상대와의 비교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왜 저사람은 건강한데 나는 왜 약합니까? 인생을 살면서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느낌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하느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인간이 죄악을 범하면서부터 불공평성이 점점 크집니다.
인간이 교만해서 생겨나는 , 인간의 힘에 의해서 생겨나는, 소유에 의해서 생겨나는 불공평성 등등이 수많은 고통을 야기시켰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이 불공평성을 없애신다는 것입니다.
51절을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보면, 교만한 자를 흩어시고 비천한 자들에게 복을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52절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을 보면, 정치적인 힘, 권력의 힘,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신을 자랑하고 사람들을 억누르는 것을 하느님께서 내리치시고 비천하고 약한자를 올리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가난하고 병든자를 찾아가셨을까요? 왜 민중들을 찾아가셨을까요?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에수님이 민중들에게는 꾸중하지 않으셨지만 자신만을 위해서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꾸짖으셨습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쓰는 이기적인 소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낮은자와 고통받는 자를 들어 높여 세워주시는 하느님의 역사가 성경 속에서 나타납니다.
53절 “굶주린 이들을 좋은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는 경제적인 것입니다.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시고 굶주린 이들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 역사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많이 가지고 있있을수록 하느님의 마음으로 주변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구원의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픈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교의 본질 자체가 변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당신의 사랑에로 변화시키고자 합니다.
여섯 번째로 54-55절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을 보면, 약속의 하느님,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는 새 역사가 이 땅에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일곱 번째 56절 “마리아는 석 달 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께 베풀어주신 모든 사랑을 마음에 담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그렇게 살도록합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순명과 믿음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구원의 역사에 협조하는 지를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이러한 성모님의 삶이 바로 우리의 것이 되도록 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