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135
2014년 8월 11 화요일
그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마태 17, 22)
오늘 우리는 아씨시의 성녀 클라라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축일을 맞는 모든 클라라 자매님들께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클라라 성년의 삶이 그녀를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모든 봉사자 여러분들의 일상 삶에서 구현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봅니다.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당신의 수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사라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성서에서 일반적으로 사람을 구원하러오신 메시아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신께서 구하러오신 사람들에 의해서 죽게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죽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가슴이 아파오고 저려옵니다. 바로 그 사람들 중에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일조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예쁜 여인입니다. 그녀는 이탈리아 아씨시의 귀족 파바로네와 오르똘라나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삶에 대해서 살펴봄은 우리가 오늘 하루도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좋은 답을 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빛'이라는 의미를 지닌 클라라의 이름은 어머니가 기도 중에 온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으면서 그녀의 어머니께서 클라라에게 지어준 이름입니다.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살아가도록 지어준 이름 ‘클라라’는 자신의 이름의 뜻대로 살아간 분이십니다.
그녀는 1210년 사순절 때 겸손과 고행의 모습으로 열정적이고 기쁨에 찬 설교를 하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감명을 받아 자기의 모든 소유와 가족을 버리고 주님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마침내 그녀가 18세가 되던 1212년 그녀는 집을 떠납니다. 이렇게 그녀의 주님을 따르는 삶을 시작됩니다. 세상의 빛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족들이 잠든 사이에 집을 떠나 성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 형제들이 있는 포르치운쿨라 성당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형제회에는 여자 수도원이 없어서 클라라는 근방의 베네딕도 수녀원에 당분간 머물러야 했습니다.
클라라는 1212년 3월 18일 성지주일에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보속의 수도복'을 받고 순명을 서약하고 축성의 의미로 머리칼을 모두 자르고 수녀로서 주님께 헌신하는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가족들이 클라라를 집으로 데려 오기 위해 찾아오자, 성녀 클라라는 제대에 꼭 기대어 자신의 삭발한 머리를 내 보이며, 자신은 수도자로서 살기로 결심한 뜻을 바꿀 수 없다며 가족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얼마 후 성녀의 동생 아네스도 수도생활을 결심하고 집을 나와 언니와 함께 생활을 하게 됩니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 뒤를 따르자 가족과 친지들은 아녜스를 강제로라도 집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로 12명의 무장한 장정들에게서 동생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첫 자매를 얻은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도움을 받아, 친동생 아녜스를 비롯한 몇몇 자매들과 함께 성 프란치스코가 마련해준 성 다미아노 봉쇄 수도원에서 복음적 가난과 사랑의 공동체 생활로 프란치스칸적 관상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클라라는 아씨시의 성 다미아노(St Damiano)수녀원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수녀원을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같은 영성으로 운영을 하였습니다. 낮에는 땀 흘려 노동하고 밤에는 성경을 중심으로 한 묵상과 기도의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클라라는 금식과 절제의 생활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녀는 분별력 있고 지혜로운 수도원장으로서 자매들의 의견에 늘 귀 기울이며 그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하였습니다.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가난을 육화한 '가난한 동정녀'로 살았던 클라라에게 성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작은 형제들은 물론이요 교황과 추기경 및 왕과 귀족들까지 기도를 부탁하며 자문을 구하러 왔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기도는 자신의 전 존재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그리고 수도원을 봉쇄한 것은 주님과 단둘이 누리는 자유의 공간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난은 그리스도를 관상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클라라는 가장 값진 진주인 천상에 대한 소망은 현세적 물질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는 소유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녀의 엄격한 고행 생활은 건강을 해치게 되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병고를 기꺼이 참으며 틈틈이 바느질을 하거나 자수를 놓아서 움브리아 지방의 가난한 교회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복음의 약속에 대한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작은 빵 하나를 50여명의 수녀들이 먹기에 충분할 만큼 불어나게 하였으며, 간절한 이웃 사랑에서 우러난 그녀의 기도와 강복으로 무수한 중환자가 완쾌 되었습니다.
또한 성녀 클라라는 자신에겐 극히 엄격하였지만 동료 수녀들에게는 어머니처럼 인자 하였습니다. 성녀 클라라의 덕을 사모하여 그 주변에 수도를 희망하는 여인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며 성녀의 어머니도 남편과 사별한 후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1240년 독일 황제 프레데릭 2세와 동맹한 사라센 대군이 움브리아 지방의 각 촌락을 점령하고 아씨시에 까지 쳐들어 왔을 당시 클라라는 자매들의 부축 없이는 자신의 몸조차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병들었지만 무방비 상태에 놓인 수도원 가족과 아씨시 시민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오로지 성체께 의탁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이 사랑하는 동정녀들을 보호할 힘이 없습니다. 원하오니, 당신이 직접 전능하신 힘으로 그들을 보호하여 적의 손에 넘기지 말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를 바치고 일어나서 성광을 모시고 천천히 적군 앞으로 나아가자 성광에서 신비한 빛이 나서 이미 봉쇄구역 안까지 밀어닥친 적군들이 겁을 먹고 물러갔다 고 합니다.
또 1252년 성탄 밤, 중병으로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그녀가 아기예수를 경배하고 싶은 큰 열망으로, 병실을 떠나지 않고도 2km나 떨어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자정미사에 참석한 듯이 선명하게 미사를 볼 수 있었던 기적을 계기로 1958년 교황 비오 12세가 성녀를 텔레비젼의 주보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253년 8월11일 가난의 특전을 간절히 원하던 교황칙서를 첨부한 자신이 만든 수도회칙을 받은 클라라는 큰 감격에 넘쳐 회칙을 가슴에 안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회칙의 원본은 1893년 성녀 클라라의 시신을 덮고 있던 수도복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1255년 클라라는 시성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간 다미아니떼 수녀들은 ‘클라라 수도회’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성녀의 삶이 배어있는 성 다미아노 수도원-성당과 유해가 모셔진 아씨시 성 클라라 대성당은 오늘날까지도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은 클라라 성녀의 삶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여러자료들을 참조하면서 클라라 성녀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녀에게 있어 기도는 자신의 전존재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사랑하는 것이었다는 사실과 수도원을 봉쇄한 것은 바로 주님과 단둘이 누리는 자유의 공간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난은 그리스도를 관상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었다는 사실이 가슴 깊이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성녀의 영성이 저에게 깊이 자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