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2014 년 7월 7일 월요일
인간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신 대표적 두분이 생각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란 세상적인 ‘행복’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적인 행복은 그것보다 좀 더 나은 조건이 충족되는 상황을 발견하면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이 이제는 불행의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상대적인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행복은 ‘절대적인 행복’입니다. 비교하지 않는 행복입니다. 이 행복의 근거에는 세상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변치않고 완전한 절대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이러한 참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갔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두분이 계십니다. 바로 김대건 신부님과 전 교황님이셨던 요한 바오로 2세이십니다. 이 두분께서 살아가신 그 삶의 흔적들을 살펴보게 되면 그 삶의 깊은 내면에는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삶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의 순교에서도 보게 됩니다.
“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역대 24,20-21).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백성들의 잘못된 신앙을 질책할 수 있었던 힘은 하느님의 영을 체험한 데서 오며, 이는 영적인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런 힘이 하느님의 영을 체험한데서 온다는 사실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이 말씀은 하느님의 영으로 인해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올바로 깨닫고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성령 체험은 어떤 곤경 속에서도 주님을 굳게 믿고 신뢰하고 있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제 목숨을 당신 손에 맡기니 주 진실하신 하느님, 당신께서 저를 구원하시리이다”(시편 31,6).
주님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이 시편의 구절을 되새기셨습니다. 목숨을 맡긴다는 의미는 인간적인 모든 안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령은 말할 수 없는 깊은 고통으로 인해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고 느낄 때에도 희망의 빛을 밝혀 주십니다. 주님의 성령은 바로 이런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3-5).
이렇게 영적인 변화를 체험한 두분께서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후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나의 마지막 때가 왔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해 죽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찾으려면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하고 새남터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동시에 전임 교황이셨던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돌아가시 전에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기를 빕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1846년에 돌아가신 분의 마지막 말씀과 2005년에 돌아가신분의 마지막 말씀 사이에서 유사함을 발견합니다. 두 분다 ‘행복’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한 분의 말씀을 참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다음 분의 말씀은 바로 당신은 행복한 데 이제 우리도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두분의 말씀을 갖고서 조용히 묵상을 해 봅니다. 비록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언급은 없으시지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의 행간을 통해서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품으로 가는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이분의 말씀을 약 160년 전에 돌아가셨던 김대건 신부님께서 풀어서 해석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시며 사제들의 수호성인이신 김 대건 신부님과 한국을 그렇게도 사랑하시고 그분을 성인품으로 올리셨던 분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렇게도 이 두분 사이에 큰 인연이 있으셨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7월은 본인에게는 참으로 의미있는 달입니다. 육적인 탄생의 날과 영적인 탄생의 날이 함께 존재하는 달이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탄생이란 이 달에 제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었기 때문이고 영적인 탄생이란 지금부터 21년 전 이 달에 사제로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살아오면서 육적인 탄생에 대해서 원망을 참으로 많이 했었습니다. 이러한 원망은 바로 세상적인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데서 오는 불만이고 원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제로서 살아 오면서 이러한 세상적인 이유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참된 행복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제로서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세상적인 것이 이러한 추구를 방해하는 경우를 많이 체험하게 됩니다. ‘유혹’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유혹들을 극복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두분의 삶은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삶이었기에 가능했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변화된 삶의 모습의 예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순교는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기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는 그 모습에서 ‘참 행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행복과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참 행복’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나 봅니다. 새롭게 주님 안에서 태어난 7월을 보내면서 다시금 ‘참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놓고 비움’에 있다는 것을,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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