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96
2014년 6월 7일 토요일
요한 21, 20-25)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 22)
예수님을 따르는데는 조건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을 물으신 후에, ‘나를 따라라” 말씀하십니다. 단순한 명령형의 문장이지만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당신이 바로 우리가 참으로 따라가야 하는 유일하고 변함이 없는 생명에로 이끌어 주시는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을 따르는 것에만 집중해야지 다른 것에 한눈을 팔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는 일이냐 오로지 너의 길만 가면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분 만이 보이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로마서 8장 26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 26)
우리가 살아가는데 모든 것 즉 고통스럽고 힘들고 슬프고 기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결국에는 함께 작용하여 좋은 결말을 맺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갔던 대표적인 사람이 창세기의 요셉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의 삶은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꿈에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을 믿고 형님들과 아버지께 말하였다가 이집트로 팔려갑니다. 엄청난 고생을 함을 우리는 압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련은 결국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으로 모여집니다.
그런데 로마서의 구절을 잘 살펴보면,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루는데 조건이 있슴을 보게 됩니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았는가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런데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은 하느님께 주도권이 있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면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인간의 경우에는 내가 사랑하는지 안하는지를 아는 방법은 떨어져 있어보면 압니다. 그리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시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양들을 잘 돌보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 대상이 나의 목적인지 도구인지를 보면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도구나 수단이 아닌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 ‘행복’은 영원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완전한 행복은 어떻게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나의 삶의 목적이 예수님이 되면 저절로 행복은 따라옵니다.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가 목적이 되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목적이 되면 하늘나라는 따라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하면 바로 그 사람이 목적이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 만을 바라보며 한눈 팔지 않으며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