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66
2014년 5월 3일 토요일
새로은 길을 사는 삶 - 부활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1코린 15, 3).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 6-7)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바오로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진 루카는 바오로가 ‘새로운 길을 따르는 사람’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체포하려 한다(사도 9, 2)고 말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길을 따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을 지칭합니다.
‘새로운 길을 따른다’는 것은 의지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익숙한 길에서 이제는 서투른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확실성에서 불확실성으로 들어감을 말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생깁니다. 따라서 믿음과 확신이 없으면 가지 못하는 길입니다. 율법에 의지하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속의 율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법을 따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4, 6-7)
그 ‘새로운 길’이 바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분은 바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이 길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길입니다.
이 길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은 바로 예수님을 믿을 때만이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어머니를 통해서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를 통해서 어머니를 보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어머니 안에 아버지가 아버지 안에 어머니가 있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답답해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그러한 믿음은 결국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신자들에게 발현하심으로 견고하게 되어갑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결합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결합된 삶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로마서 6장 3-5절에서 잘 보여줍니다.
“3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한 죽음으로 설명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한 우리가 다시 죄와 결합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고 말합니다.
세례로서 우리는 죄에대해서 죽었습니다. 세례는 죄와 결합된 삶을 살아가던 내가 죽고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된 삶을 살아감을 말합니다. 부활의 참의미가 바로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 27)
부활은 새로운 길을 따르는 사람으로 거듭남을 말합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삶을 통해서 성령을 받는 삶을 말합니다(갈라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