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46
2014년 4월 10일 목요일
사랑은 용서하는 삶입니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요한 5, 41)
사순시기는 ‘용서’를 많이 생각하게 합니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대상이 됨을 말합니다. 요즈음 관계를 말할 때 ‘갑’과 ‘을’이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느냐에 대한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용서를 하는 사람은 ‘갑’의 입장인 것같고 용서를 받는 사람은 ‘을’의 입장처럼 보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자신이 ‘갑’의 입장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내가 ‘갑’의 입장에서 하는 용서라면 그 용서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참된 용서는 ‘을’의 입장에서 하는 용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용서를 한다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나도 용서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상처를 받은 것만 생각하지 내가 상처를 준 것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행을 깨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하셔야 하는 분이시지만 ‘용서’를 받기 위한 분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용서’의 어려움은 내가 ‘갑’의 입장에서 하는 것일 때 어렵습니다. 하지만 나도 용서를 받아야 하는 ‘을’의 입장도 동시에 갖고 있슴을 깨우치게 되면 ‘용서’는 쉬워집니다. 그래서 타인의 입장에서 나를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삶은 ‘용서’하는 삶입니다. 이 용서도 내가 주체가 되는 용서가 아닌 내가 대상이 되는 ‘용서’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을려고 하면 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영광을 받기 위한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있었던 대통령이 주재한 ‘규제 개혁 대 토론회’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규제들이 처음에 생겨날 때와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이후에 이러한 규제들이 처음 생겨날 때의 순수한 그 취지가 유지되고 있는 가에 대한 생각이 듭니다. ‘율법’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의 취지의 순수성이 훼손되기 시작할 때 예수님께서는 원래의 순수한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정신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613개의 율법이 필요한 것이 아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의 율법 만이 중요함을 강조하십니다. 이러한 원래의 취지를 회복할 수 없으면 없애고 다시 제정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규제하는 입장과 규제를 받는 입장에 선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본다면, 일의 효율성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일상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이란 바로 원래의 취지로 돌아가는 삶을 말할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는 나의 존재의 이유와 타인의 존재의 이유를 이기적인 이익의 관점에서가 아닌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는 관점에서 보는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의 시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