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809
2016년 10월 20일 목요일
예수님의 소통방법(루카 12, 49 - 53)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 51)
저희 연수원에 김희중 광주 대교구장이시며 현재 한국 주교희의 의장이신 주교님께서 광주교구의 새사제들과 함께 오셔서 2박 3일 동안 지내다 가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매년 연초에 서품 받은 새 사제들과 함께 여행을 하신답니다. 저에게 보여진 여행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선교여행을 다니시는 것처럼 보여서 새로웠습니다. 주교님과 함께 봉헌하는 미사는 참으로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안식년을 지내시는 신부님들과 함께 강의도 듣고 산책도하고 식사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한번 더 사제로서의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인가를 깨닫을 수 있고 동시에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와 하시는 소통의 방법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게 하십니다. 참된 구원을 위해서는 정 반 합의 영적인 변증법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하십니다.
인간은 예수님께서 왜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지를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불’은 성령, 사랑, 심판 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의미함을 알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죄를 불태우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에 물든 인간에게 다시금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앞에서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을 들여다 보게 하십니다. 사랑의 거울에 비친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은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다시금 하느님을 섬기는 삶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세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한 갈등인 것입니다.
한 집안에서 가족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것 역시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출산의 아픔인 것입니다. 구원의 말씀을 받아 들임에 있어서 당연히 겪어야 하는 정 반 합의 변증법적인 구원의 운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곳곳에서 사고가 빈발하고 이러한 사고로 인해서 많은 고귀한 생명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런 인재에 의한 사고가 수없이 빈번하게 발행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인재에 의한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사고 공화국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저는 이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사고가 생기기 전과 후의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모순된 것이과 어리석은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2년 전 성수대교가 떨어지던 그 날 저녁 저는 아버님께서 교통사고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로마에서 한국에 도착한 날이었습니다. 저녁에 도착했지만 이 사고로 인한 교통체증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다리가 무너지기 전에 이 다리를 건넜던 사람들은 아무런 걱정도 없이 건넜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리가 무너지고 난 뒤에 다른 다리를 건너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튼튼한 다리를 건너면서도 이 다리도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건넜을 것입니다. 정작 무너질 다리를 건널 때는 전혀 걱정하지 않다가 무너지고 난 뒤에는 무너지지 않는 다리를 건너면서도 무너질까 걱정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서 오셨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의 어리석음 역시 이와 같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인간을 두고서 예수님께서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라고 안타까워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들의 굳은 마음과 교만한 마음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저의 마음 속 깊이 전달되어 옵니다.
인간은 진실을 두고서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인간에게 만이 일어날 수 있는 분열입니다. 자신의 이해가 진실임을 알면서도 진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장 6절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평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에 평화를 주러오신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것처럼 보여지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진실을 부정합니다.
의도적으로 평화를 부정하고 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나와 동떨어진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이런 부정의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이고 지금도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슴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짓을 덮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셔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이 바로 세례입니다. 가장 완벽한 세례입니다. 이러한 죽음이 세상에 죄악을 드러내게 합니다. 이러한 죽음이 이제 세상의 거짓과 죄를 없애 버립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구원을 위해서 겪어야 하는 정 반 합의 과정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하루이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