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795
2016년 10월 4일 화요일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축일에(루카 10, 38-42)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 41-42)
오늘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먼저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인에 대해서는 굿 뉴스의 오늘의 성인란에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매일 미사에서의 성인의 소개를 인용해 드리고자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기사의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그는 많은 보석금으로 석방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예전처럼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회복한 그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기도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젊은이들이 모여들자 그들과 함께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를 설립하여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였습니다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 무렵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러한 오상의 고통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1226년에 선종한 그를 2년 뒤 그레고리오 9세 교황님께서 시성하시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요나라는 인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도록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약속을 너무 쉽게 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우리의 입장을 보면, 우리가 힘들 때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쉽게 하느님과 약속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이 조금 나아지면 그 약속을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경시키든지 잊어 버립니다. 하느님과의 약속을 너무 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요나는 그 댓가로 죽음의 일보직전까지 가는 벌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약속하신 것은 꼭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의 이면에는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하느님과 약속한 것은 꼭 지켜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참으로 이중적인 인물입니다. 자기가 하느님과 약속한 것을 자신의 개인 감정 때문에 지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죄악으로 가득찬 니네베로 가서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 4) 하고 외치라고 하였지만 이들이 회개해서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싫어서 니네베로 가지 않고 주님을 피해서 배를 타고 타르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다 위로 큰 바람을 일으키시어 그 배가 거의 부서지게 합니다. 잠들어 있던 요나에게 배의 선장이 요나를 깨웁니다. 요나의 신에게 구해달라고 청하라고 합니다. 뱃사람들은 “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하고 제비를 뽑습니다. 요나가 걸렸습니다. 요나는 이 순간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을 희브리 사람이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밝히며 자신으로 인해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제물로 삼아 바다로 던지라고 합니다.
비록 하느님을 피해서 도망가던 요나였지만 이 순간은 참으로 멋있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책임을 회피하던 사람에서 당당히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놓으며 책임을 지는 모습으로 변한 요나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이 두 사람은 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잘 해드릴까?’ 하며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여인들이었슴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예수님을 자기 방식대로, 자기 뜻대로 예수님을 접대하고자 했습니다. 본인도 가끔 초대를 받아가면 그러한 마르타와 같은 모습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부담은 되지만 그래도 감사하게 그분들의 바람에 따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열심히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신자분들의 초대를 받아서 가정 방문을 하거나 구역모임에 가면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모임이 시작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준비로 분주한 우리 자매님들의 모습을 봅니다. 잘 대접하려는 그분들의 마음은 잘 알고 있지만 모임 시간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고 마르타의 모습으로 시중을 드는 자매님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분위기 마저 흩어지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손님을 초대해서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기 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에게 부담이 되지 않게 편안함을 주는 것이 좋은 대접의 방법일 것입니다. 마리아는 조용히 앉아서 손님의 말을 들어줍니다. 마리아의 모습이 오히려 손님을 덜 부담스럽게 만듭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예수님곁에서 자신의 일은 도와 주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던 마라에게 화가 났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봉사하느라 분주한 데 마리아는 한가로이 편하게 주님의 말씀만 듣고 있는 것 같아 속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불평을 토로합니다.
40절 후반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두둔하시는 것같이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 주님의 말씀이 마리아를 인정하시고, 마르타를 부정하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마리아도 마르타도 다 인정하십니다. 단지 마르타의 부족함은 그녀의 봉사, 이웃 사랑이 섬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인정을 받기 위한 것에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에서 나왔기 때문에 마리아를 판단하고 마리아에 대한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기쁨을 드리고 싶었지만 그것은 내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예수님이 가장 좋아하는 것대로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느님과의 약속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하루를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책임을 지는 하루를 , 나를 죽이고 주님께서 주인이 되는 하루가 되기를 다짐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모든 분들께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