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747
2015년 8월 10일 수요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에 (요한 12, 24-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요한 12, 26)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축일을 맞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굿뉴스에서는 이 성인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로마(Roma)의 일곱 부제(차부제 포함) 중 한 명인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에스파냐의 우에스카(Huesca) 출신이며,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교황 성 식스투스 2세(Sixtus II, 8월 7일)의 부제였고, 식스투스 교황이 사형을 받게 되자 슬픔을 억누르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교황은 그 역시 3일 안으로 자신을 따라 오리라고 예언하자, 라우렌티우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교회의 소유물들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로마의 집정관이 그의 이런 행위를 알고는 교회의 보물들을 모두 황제에게 바치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때 그는 모든 보물을 모으려면 3일 정도가 소요된다는 말을 하고 돌아와서는 모든 보물들을 맹인과 절름발이, 고아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분개한 집정관은 그를 체포하여 온갖 고문으로 괴롭히다가 석쇠 위에 눕히고는 구워 죽였다. 시인 프루덴티우스(Prudentius)에 의하면 그의 죽음과 표양이 로마의 회개를 가져왔고, 로마에서 이교의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문장은 석쇠이다.(굿뉴스 참조)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고 말씀하십니다. 이 밀알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간직하고만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그냥 좋다는 생각만을 갖고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 안에 간직하기만 하면 그 말씀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를 많이할 뿐만 아니라 피정 또한 빼놓지 않고 다니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보고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들을 만나면서 한가지 부족한 것을 접하게 됩니다. 바로 ‘실천’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일상에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그러한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상 삶과 기도와 말씀이 따로 따로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주는 것보다는 소유하기를 좋아합니다. 이웃을 위해서 베푸는 삶에는 인색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주시는 복은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를 통해서 축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 3) 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큰 복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복은 우리가 기대하는 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축복은 바로 ‘주는 축복’ 즉, “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큰 축복의 이면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고 친척들을 떠나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익숙한 것에서 낯선 곳으로의 떠남입니다. 이 낯선 곳은 오로지 주님께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파견을 통해서 우리가 당신께만 의지하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말씀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 24-25)는 예수님의 말씀은 일맥상통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바로 ‘떠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열매를 맺음’은 ‘많은 민족들에게 베푸는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속적인 영광과는 다른 것입니다. ‘나 자신을 세우는 것’이 세속적인 영광이라면 참된 예수님의 영광은 ‘나 자신을 죽이는 것’ 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헤서 돌아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십자가 위에서 죽음은 바로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요한 12, 26)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죄를 더이상 기억하지 않으시고(예레 31, 34) ‘언제나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함께 있는 것과 아버지께서 존중해 주실 것’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자신을 올리는 세상적인 영광을 추구하기보다는 나를 십자가 상에서 죽이는 천상적인 영광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필요한 곳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삶을 통해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 19-20)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