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742
2016년 8월 4일 목요일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 축일에 (마태 16,13-19)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16,15
오늘은 요한 마리아 비안네(John Mary Vianney)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신부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비안네 신부님에 대해서 굿뉴스에 실려있는 간단한 소개를 드리고자 합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 Maria Vianney)는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옹(Lyon) 근교에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 농부인 마태오와 마리 블루즈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비안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5세 때에는 파리(Paris)에서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추방되고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비안네는 어린 시절을 주로 부친의 농장에서 양을 치면서 지냈다. 정규 교육은 몇 개월밖에 받지 않았지만,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여 비밀리에 첫 고해(1794년)와 첫영성체(1796년)를 받았다.
18세 때 부친의 허락을 받고 에퀼리(Ecully) 본당 발레(Balley)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개인적으로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기초 교육이 부족하고 수학 능력도 많이 떨어졌다. 특히 라틴어 공부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정식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은 신학생이었던 비안네는 1809년에 징집을 당해 갖은 고통을 겪었다. 1811년에 베리에르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 과정을 공부하고 1813년에는 리옹의 대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였으나,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아 1년 만에 퇴학당한 비안네는 학과 성적은 부족하였지만 발레 신부의 도움으로 신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신심과 성품을 인정받아 1815년 8월 13일 그르노블(Grenoble)에서 시몽(Simon)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서품 후 발레 신부가 있는 에퀼리 성당에서 2년 동안 보좌 신부로 생활한 비안네 신부는 1818년에 230여 명의 주민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 아르스의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는 여기서 죽을 때까지 42년 동안이나 봉직하면서 주민들에게 열렬한 신심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비안네 신부의 노력으로 아르스의 종교적인 분위기는 일신되었고, 그 또한 설교자와 고해신부로 대단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1827년부터 수천 명의 고해자들이 그에게 성사를 받기 위해 한적한 시골 마을 아르스로 찾아올 정도였다. 매년 2만여 명의 신자들이 비안네 신부를 찾아왔기 때문에, 그는 오전 11시에 설교를 하고 성무일도와 식사, 특별한 상담 시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약 18시간 정도 고해성사를 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동료 사제들은 그를 잘못 판단하고, 그를 무식하고 지나치게 열성적이며 허풍선이라고 비난하곤 하였다. 이에 대해 그의 주교는 “저 신부만큼이나 모두 미쳤으면 좋겠다.”고 하며 그를 옹호하였다.
이렇게 열심한 그 역시 가끔씩 사탄의 유혹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성품은 지극히 단순하였고, 충고는 간단명료하였으나 신심이 차고 넘쳤으며 직선적인 설교를 하였다. 순례자들의 소란, 끊임없는 고해성사 요구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단지 세 번 아르스를 떠났는데, 그것은 모두 수도원에 잠시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비안네 신부는 열심한 성무에 지친 나머지 1859년 8월 4일 73세의 나이로 아르스에서 사망하였다.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가 된 비안네 신부는, 1925년 5월 3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시성되었으며, 1929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본당 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오늘 저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깨어서 질문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삶이 바로 질문하는 삶이고 이 질문이 바로 하느님과의 대화이며 기도하는 삶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삶은 항상 기도하시는 삶이었슴을 복음서를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복음 사가들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도할 때는 중요한 일들과 연관이 있슴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공관복음서에는 함께 보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나오는 이 부분이 있기 전의 부분은 복음서들 사아이에 공통된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들도 있지만 루까 복음서에서 보도하고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 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해서 누구라고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시기 전에 몇가지 중요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들 고치라고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열심히 자신들의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활동이 헤로데에게 보고가 됩니다. 헤로데는 당황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일도 아니고 옛 예언자들의 일도 아닌 예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압니다. 두려움에 쌓인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헤로데는 만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자신들이 한 일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벳사이다라는 고을로 가십니다. 그러나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시어, 하느님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장정만도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혼자 기도하십니다.예수님께서 혼자서 기도를 하신 후에 함께 하던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군중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
이러한 기적을 보았던 군중들이 당신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입니다. 세례자 요한, 혹은 엘리야 혹은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회학자인 마틴 부버가 ‘나와 너’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쓰면서 관게에 대해서 말합니다. 인간사이의 관계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당신 ‘이라고 하는 인격적인 관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사물과의 관계가 아니라, 물질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이고 대화적인 관계가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군중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그 질문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은 이야기를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질문입니다. 내 실존이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내 존재 전체를 갖고 고심 끝에 나온 대답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대답입니다. 하지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즉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은 나의 전삶을 담은 대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3인칭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지성 만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2인칭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릅니다. 나의 지성, 나의 의지, 나의 감정 등 나의 전 존재를 담은 답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우리의 결단과 다짐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확고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답을할 수 없는 질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에게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답하기 어려운 이러한 질문을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나 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다시 한번 나의 신원에 대해서 확인하게 합니다. 나의 모든 삶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 삶이어야 함을… 내가 중심이 되는 삶에서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삶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바로 지금 내가 바쳐야 하는 기도임을 명심합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너는 나를 누구하고 생각하느냐?”하는 예수님의 질문을 마음에 담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입으로 만의 대답이 아닌 나의 삶이 닮긴 진지한 답을 삶으로서 드리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