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740
2016년 8월 2일 화요일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 31)”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14, 22-36)
몇일 전 아침에 형수님께서 아침 식사 중에 갑자기 ‘제가 신통 방통한 생각을 했습니다. 무언가 하면, 여태까지는 형님이 갖고 있는 장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단점만 보면 지적하고 고치라고 했었는데 갑자기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형님이 열심히 일하신 덕분인데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여태까지는 하느님께는 감사를 했는데 이제부터는 형님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노력을 해야 겠다고 생각을 하셨답니다. 갑자기 그런생각이 드니까 형님의 단점보다는 장점이 먼저생각나고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기드랍니다.
피정을 다녀온 바로 다음날이라 저는 형수님께 참으로 신통방통하신 생각이시네요. 하느님의 은총이시네요 하고 답합니다.
우리가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형수님의 말씀이 새롭게 들려옴은 이론으로서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담긴 나눔이어서일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내가 믿음의 사람인데 이 정도쯤이야 하면서 그 순간들을 이겨나가시는 형수님을 보고서 친구들은 역시 가톨릭 신자인 너는 다르다는 말을 들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아니냐 누구나 그 상황이 되면 그렇게 할꺼야 .’하고 답하시는 형수님의 말씀이 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습니다.
피정을 다녀 온 다음 날 아침을 제 2의 피정으로 시작한 느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시고 바로 나와 함께하신다는 말이 너무나 당연힘을 느낍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안과 두려움이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불완전한 존재가 불완전한 세상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존재가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 만들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피정 파견미사 때 체험담을 들었습니다. 발표자 중에 장애아이가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발표를 시키는데 이 아이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시켜야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순간적으로 고민을 하다가 시켰습니다. 함께 하고 계시는 부모님의 심정은 그 순간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프란체스코가 저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프란치스코와 눈을 마주보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저의 심령기도는 주님의 마음을, 프란치스코의 더듬거리는 그 말은 부모님과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은총과 사랑의 조화를 체험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또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나눔을 못하겠다고 하던 아이가 일어섰습니다. 안수 받을 때의 느낌을 말하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은총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피정에 왔다는 이 아이는 안수를 받는 동안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을 들었답니다. 이 아이의 주님의 사랑에 감격한 눈물이 모든 참석자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 아이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나의 사람하는 아들이고 딸임을 확인시켜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는 말씀이 앞으로의 삶에 큰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평화를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세상의 어떠한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가 없다(로마 8, 35-37)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말을 되새겨 보면 세상적인 ‘환난이나 역경, 그리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그리고 칼’등은 사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음으로 이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불완전한 존재가 갖는 유한함을 완전함에로 이끌어 주는 힘은 완전자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이 주는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 입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제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우리이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가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기에 우리는 세상을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으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난 뒤에 떠나셨기 때문에 떠나신 이유에 대한 여러자기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헤로데의 위협을 피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제자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마르6, 31-32)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보시고 이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또 먹지 못하고 당신을 따라다니는 오천명이상의 사람들을 보시고 이들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을 잘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난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들을 돌려 보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을 우리는 요한 복음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 6장 14-15절을 보면,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제자들과 군중들을 따로 따로 서둘러서 보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기도하기 위해서 산으로 가십니다.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여러가지 중요한 일의 전 후로 해서 기도를 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기도를 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도는 바로 아버자와 예수님과의 깊은 일치를 이루게 하는 도구였슴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과의 하나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세상적인 유혹을 이기게 하고 세상적인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되게 합니다. 이 기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 20)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배를 타고 폭풍우에 시달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일반적으로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맞바람과 파도는 박해와 시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신다는 것은 자연을 지배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하고 의심을 가집니다. 이러한 의심이 유혹에 빠지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고 의심을 갖게 되면 사탄을 바로 그 순간 우리를 자신의 편으로 데려가고자 합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로 물위를 걸어로라고 명령하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확인을 요구합니다. 확인을 통해서 믿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갑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유혹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나약한 믿음을 긍정하게 합니다. 결국은 자신의 영향권 안으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우리의 모습을 베드로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의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는 외침이 바로 세상의 유혹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외침입니다. 이어서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갖고 살아가는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과 해결책임을 동시에 알려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부재는 우리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다 주고 동시에 이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믿음을 가져야 함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매 순간 순간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 31)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속 저 깊은 곳에 간직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갈라 2, 20) 하루를 살고자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