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734
2016년 7월 26일 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마태 13, 36-43)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 41-42)
오늘은 성모님의 부모님이신 성 요아킴과 안나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동시에 두 분에 대한 소개를 굿뉴스의 자료를 인용해서 소개해 드립니다.
“성모 마리아(Maria)의 부모인 성 요아킴(Joachim)과 성녀 안나(Anna)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일체 언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 이외의 전승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170-180년경에 쓰여진 “야고보 원복음서” (Protoevangelium Jacobi)는 비록 교회에서 위경(Apocrypha)으로 간주되지만, 마리아의 부모에 대해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실제 이 책은 초대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던 작품일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어 마리아에 대한 공경에 한몫을 하였다. 물론 교회에서 위경으로 간주한 만큼 이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이 역사적으로 실제 벌어졌던 일들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야고보 원복음서”에 따르면, 성 요아킴은 부유하고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성녀 안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이들에게 흠이라고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여겨지기 때문에, 요아킴은 시무룩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로 하느님께 단식하며 기도드리기로 결심하고는 광야로 갔다. 그 동안 집에 홀로 남겨진 성녀 안나 또한 주님 앞에서 울며 탄식 기도를 바쳤다.
이 부부의 간절한 기도는 곧바로 응답을 받았다. 한 천사가 성녀 안나에게 나타나 그가 잉태하여 낳은 아이는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예고해 주었다. 이에 성녀 안나는 그 아이를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중 이와 비슷한 환시를 본 성 요아킴 역시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딸을 낳았고, 안나는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이가 3세가 되었을 때,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마리아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양육받도록 맡겼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축일과 함께 마리아를 하느님께 봉헌한 어머니 안나와 아버지 요아킴의 축일도 생겨났다. 그리고 많은 교부들이 “야고보 원복음서”를 즐겨 인용하면서 이러한 경향이 고조되었다. 원래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를 기념하는 축일은 9월 9일이었다. 이를 기념하는 전례가 6세기 동방 교회를 거쳐 8세기 이후에 로마로 도입되었고, 14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6세기에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에 성녀 안나를 기념하는 성당이 건축되었고, 중세 시대 유럽에 성녀 안나에게 봉헌되는 성당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성모 마리아의 부모에 대한 공경을 확산시켰다. 그 결과 15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가 7월 26일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기념 축일로 지정하였다.
이처럼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가 일반인들에게 특별한 공경을 받는 성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 가정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결혼 생활의 모범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가정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예전에는 대가족 제도였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포함되지 않는 가정상이 낯설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마리아의 부모까지 포함시켜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교회 미술 작품에서 성녀 안나는 주로 영원하고 신적인 사랑을 상징하는 초록색 망토와 빨간 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표현되며,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반면, 성 요아킴의 상징은 성전에서 행하던 그의 경건한 제사와 관련되어 어린 양, 백합, 새장 속의 비둘기 등이다.”
오늘 저에게 오시는 에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삶을 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살면서 부지불식 간에 자신의 부족함으로 남이 죄짓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처음에는 좋은 씨를 뿌리지만 그 씨가 자라는 동안에 주변에 가라지도 함께 자랍니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다 보면 뿌리가 서로 얽히게 됩니다. 따라서 밀 밭에서 함께 자라고 있는 가라지를 없앨려다가 밀까지 뽑아 버리는 우리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이나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수확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원래 선으로만 가득차 있었지만 세상이 이러한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고 추함을 간직하게 된 근본이유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의 나약함에 있습니다.
사탄의 작용에 기인하는 악을 제거한다는 것은 한 순간에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종말 즉 심판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이러한 기다림의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깨어있는 자세로 사탄의 작용을 바라보며 이에 현혹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 내용 가운데서 참으로 인상에 남는 대목은 농장의 일꾼들이 주인에게 가서 “좋은 씨를 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저 잡초들은 어디에서 왔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주인은 태연하게 “원수의 짓”이다 하고 답합니다. 이러한 질문과 응답을 통해서 참으로 좋은 씨(우리 인간을 모두를 창조하실 때 그분은 우리를 선한 인간으로 창조하셨음)를 뿌리셨던 분은 하느님이시고 이들에게 잡초(악한 마음을 갖게 유혹한 존재)를 뿌린자가 바로 우리의 원수인 ‘사탄’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가라지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는데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이 살펴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가 속해있는 공동체안에서 살펴봅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문제가 생길 때 서로가 자신을 보지 않고 타인을 먼저 보기 때문입니다.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관계의 중심에 하느님은 없고 일 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없고 업적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가라지는 공동체의 성장과 일치를 방해하는 사람들, 즉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사람들, 하느님과 공동체와의 더욱 깊은 만남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가르킨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판단하겠습니까.
하느님이 관계의 중심에 있으면 남의 탓이 아닌 나의 탓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선인과 악인의 구분과 옳고 그름을 심판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귀속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가라지를 태우는 것이 추수 때의 일이라면 우리 주위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고 자신에게로 탓을 돌리는 것은 또 하나의 신앙의 덕이 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판단은 더디하고 행동은 신속하게 하는 덕을 배우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되는 공동체의 주역이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내려놓는 하루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