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733
2016년 7월 25일 월요일
야고버 사도 축일에 (마태 20, 20-28)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 26-28)
오늘은 야고버 사도의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야고버 세례명을 갖고 있는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굿뉴스에서 알려주는 야고버 사도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성 야고보(Jacobus)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형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였다. 그들은 부친과 함께 겐네사렛 호수에 배를 띄워 고기잡이로 살던 사람들이다(마태 4,21-22; 마르 1,19-20; 루가 5,10-11).
그들은 예수와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Andreas)의 집에 갔을 때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예수께서 낫게 해주신 현장에도 있었다(마르 1,29-31). 그들은 또 자기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와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태 20,20-28) 하고 청했던 사람들이다. 또 천둥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둘 다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얻었고(마르 3,17), 예수께서 사마리아에서 냉대를 받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루가 9,54)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에는 베드로(Petrus)와 그들 형제만 따라오게 하셨으며(마르 5,37), 예수의 영광스런 변모 순간에도 베드로와 그들 형제만 함께 자리하게 하셨고(마태 17,1-8), 게세마니(Gethsemane)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러하셨다(마태 26,36-46).
성 야고보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하여 예루살렘에서 참수를 당함으로써 사도로서는 첫 번째로 순교하였다(사도 12,1-2).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그는 순교하기 전에 에스파냐에서 설교하였는데, 그의 유해는 에스파냐 북서부 갈리시아(Galicia) 지방으로 옮겨져 모셔졌고, 후일 이곳에 대 야고보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지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는 도시가 형성되었고, 이 도시는 유럽의 3대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이다.”(굿뉴스 오늘의 성인)
오늘 아침에 저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신부로서 살아가면서 내가 예수님께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십니다. 신부가 아닌 나의 현재의 모습을 가끔 상상해 봅니다. 신부이기에 누리는 특권이 너무나 많습니다. 포기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보상과 혜택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에게는 주시지 않은 ‘자유의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인간 외의 모든 피조물들은 예외없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주신 본능을 좇아 큰 변화와 차이가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결단과 선택을 통하여 스스로의 삶을 창조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사람들의 삶은 그 자유의지를 통한 선택을 통하여 결정됩니다. 다시말해서 사람은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하는가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양한 삶의 길에서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해서 만족하는 사람은 참으로 드뭅니다. 그런데 자신이 중심이 아닌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은 세상적으로는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상급을 받고 살아갑니다. 하느님 때문에 포기하는 삶은 세상적으로는 불행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참 행복의 삶을 살아가고 잇는 것입니다.
오늘 저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은 착한목자의 모습입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악한목자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자신의 양들을 죽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빵의 기적처럼 빵 2개와 물고기 5마리로 오천명을 살리기도 하고 오천명을 먹일 양식으로 자신이 독차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을 두고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십니다. 죄를 지을 자유까지 허락하신 하느님은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나 봅니다.
로마서 1장 1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소개할 때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당시의 종의 개념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종’과는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인의 의지대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종의 개념을 알고 있는 바오로 사도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종이 되면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자유하면 세상의 노예가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하느님보다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더 사랑하면 이들의 노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언론은 밝음보다는 어둠을 먼저 보도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보이는 세상은 어둠이 꽉찬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소리없이 자신의 본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이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이분들의 삶이 이 세상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옳음을 소리높여 외치는 사람들보다는 이렇게 소리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심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비교의 정의가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원래의 창조된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주인과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으로 정했으면 그것에 만족하면 되는데 우리는 그 계약을 넘어서 남은 어떠한 계약으로 얼마나 받는가에 관심을 둡니다. 이러한 비교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어 감을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뱀의 유혹에 빠지는 것에서부터 지금까지 진행되어 옴을 봅니다.
주변의 많은 분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하고 소개합니다.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이 새로 신자가 된 사람들을 두고 판단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도 오래된 햇수만큼에 상응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오히려 오랜기간의 믿음의 생활이 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지 오래된 것이 자신보다 나중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모태신앙이 못해신앙으로 변질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교만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신앙을 가진지 오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의 축복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과 다를바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받고 못받음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그만큼 축복의 생활이 늦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분들의 신앙생활을 도와 주는 것이 오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더욱 이해가 빠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신앙생활은 오래하면 할수록 겸손의 덕이 쌓여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보수를 주더라도 만족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질문에 바오로 사도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정의 했듯이 ‘주님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자신있게 대답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자기를 부인하는 행동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표입니다. 기도는 오로지 하느님만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오로지 하느님 만을 신뢰한다는 다짐으로 하루를 시작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