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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14 15:20
   자비를 실천하는 삶(마태 12, 1-8) - 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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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1,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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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725

2016년 7월 15일 금요일

자비를 실천하는 삶(마태 12, 1-8)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 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 7)

오늘은 보나벤투라 성인의 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굿뉴스의 성인 소개편을 보면, 성인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조반니 디 피단차(Giovanni di Fidanza)라는 이름의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아버지 조반니 디 피단차와 어머니 마리아 디 리텔로(리텔라)의 아들로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불확실한 전설이긴 하지만 보나벤투라는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이름이라 한다. 그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그가 어렸을 때 중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게 중재 기도를 바쳐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는 1238년에 작은 형제회 수도자가 되어 영국의 유명한 헤일스의 알렉산데르 문하에서 공부하려고 파리(Paris)로 갔으며, 그로부터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었다. 그는 1248-1255년까지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과 성서를 가르쳤는데, 그의 강의는 새로운 탁발 수도자를 반대하던 교수들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생 아무르의 빌리암을 비롯한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는 논쟁에 뛰어들어서,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남겼다. 마침내 1256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생-아무르를 단죄하고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켰다. 탁발 수도회가 파리에서 다시 부흥될 때 그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와 함께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와 비슷한 초창기에 성 보나벤투라는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피선되었고, 수도회의 내부 분쟁자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하였으며, 온건한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극단주의 그룹을 단죄하였다. 1260년 나르본(Narbonne)에서 열린 수도회의 총회에서 그는 오랫동안 수도회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는 회칙에 대한 회헌을 선포하였다. 그는 1265년 요크의 대주교좌를 거절하였고, 1271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의 선출을 적극 지지하였다. 1273년 그는 알바노(Albano)의 교구장 추기경이 되었으며, 다음 해에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로마(Roma)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토의하려는 리옹(Lyon) 공의회의 의사일정을 짜도록 그를 위촉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회기 중인 7월 15일에 리옹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보나벤투라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 중의 한 분이다. ‘세라핌 박사’로 알려진 그는 수많은 글을 썼고 또 남겼는데, “베드로 롬바르드의 금언에 대한 주석”,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 “세 갈래 길”, “완덕 생활” 등의 영성 서적을 비롯하여 성서 주석, 약 5백 편의 설교 등이 유명하다. 그는 1482년 4월 14일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에 의해 시성되었고, 1588년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로부터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성체와 성합 그리고 추기경 모자가 그의 상징이다.”

새로운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일까를 질문해 봅니다. 새로운 사람이란 과거에 매여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니코데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새 사람입니다. 

오늘 아침에 찾아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새로운 질서, 새로운 사고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새로움의 원천은 ‘돌아감’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셨던 그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서 창조되었던 그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살펴봅니다.

어부였던 사람들이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모습을, 세관원이었던 레위가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요한의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그 모습도 함께 봅니다. 이들은 과거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세상을 놓고서 거룩함을 쫓아갑니다. ‘거룩함’이란 하느님과 연관을 맺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과의 연관을 끊고서 나아가지 않으면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고민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너무 많은 생각은 선택을 머뭇거리게 합니다. 이 머뭇거림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나를 잡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즉각적’이었습니다. ‘곧장’ 따라갔다고 합니다. 이 말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부분적인 포기로서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고 난 뒤 혹은 준비를 하고’라는 이유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가장 큰 훼방꾼입니다.  새로움의 추구는 즉각적이고 전적인 투신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일이기에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인 당신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시랍니다.  안식일에 대한 모든 권한이 당신께 있슴을 보여주십니다. 따라서 안식일의 규정을 준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안식일의 존재의 이유인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선이고 인간이 우선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제도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이러한 제도나 규범이 오히려 인간을 도구화시킨다면 그 제도는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인간을 위한 안식일인데 이 안식일이 인간을 안식일의 노예로 살아가게 합니다. 인간이 만든 것인데 인간의 주인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제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내가 아닌 우리가 주인입니다. 제도 그 자체보다 인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안식일의 존재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함임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 모든 창조물은 인간의 관리하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인간이 죄를 범한 뒤에 하느님의 위치에 인간이 들어와 있고 인간의 위치에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주와 종이 뒤바뀐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면 되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할려고 하는 욕심 때문에 필요한 것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을 서로 비교하게 합니다. 비교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소유에 욕심을 갖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필요한 만큼’의 개념이 사라집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필요한 만큼 소유하고 활용하는 사람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와 ‘주와 종’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바라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사랑의 실천입니다. 참 제물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나는 어떠한 사랑을 실천할까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은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내가 대하는 사람을 대하실까를 생각하면서 그분을 대하고자 다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일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만사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고 하셨습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느꼈으면 합니다. 그러한 실천이 우리의 삶을 생각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에 두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우상이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우상을 만든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고서  언제나 깨어서 자비를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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