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720
2016년 7월 9일 토요일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마태 10, 24-33)
“32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 32-33)
하느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세상적인 일과 하느님의 일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 세상적인 이해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선택하고 증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 저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로 살다가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오로지 믿음을 잃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 바로 전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선교의 현장에 가게 되면 박해를 받게될 것이라는 말씀과 그러한 박해에 직면해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알려주시고 그리고 그러한 박해들을 통해서 받게될 위안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위안들에 대해서 먼저 살펴봅니다.
첫 번째의 위안은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 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 10, 19-20)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박해와 재판을 받고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 하는 것도 사실상 복음을 전하는 일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
두 번째의 위안은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22) 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위안은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23)의 말씀입니다.
이어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번째 받게될 위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 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네 번째의 위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제자와 스승’ 그리고 ‘종과 주인’이라는 비유를 쓰실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이며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하신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종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종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인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느님 앞에선 우리는 종이기도 하고 제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당신 앞에선 모든 존재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그냥 제자이며 종이라는 관계가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인간들 사이에는 하느님 앞에서 ‘똑같음’의 관계가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서로가 자신을 높이고 지배하려 듭니다. 구별하려 합니다.
당시의 바리사이들은 ‘똑 같음’을 부정했습니다. 이러한 높고 낮음의 구분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았기에 원래의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이제는 자신이 만든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인간을 보아야 함에도 인간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우선이되고 하느님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우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기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하느님의 영역에는 들어오지 말아랴 한다는 말씀을 듣고서도 사탄의 유혹에 빠집니다. 예수님의 이어지는 말씀이 이를 깨닫게 합니다.
“사람들이 집 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마태 10, 24)
여기서 ‘집 주인’은 예수님을 말하고 ‘집’은 교회를 말하며 ‘그 집 식들’은 제자들과 신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마귀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9장 34절의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는 말씀에서 가져온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마귀의 우두머리로 생각하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심하게 박해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박해를 이겨내면 우리는 바로 스승처럼 되고 주인처럼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박해를 견디어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네 번째의 위로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을 둘러보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방해요소들이 있습니다. 외적 내적인 유혹입니다. 이러한 유혹들을 이겨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기에 그 길이 바른 길처럼 여겨집니다. 군중심리에 휩쓸리는 것은 죄가 아닌것처럼 생각됩니다. 대세를 거스르기가 너무나 힘이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그것이 대세인 것처럼 보이지만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인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나 달콤함에 빠지기 보다는 겉은 형편없지만 내적인 아름다움을 선택하는 지혜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위선, 즉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나 달콤함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선은 순간은 감출수 있어도 최후의 심판 때가 되면 위선과 악의는 하느님 앞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고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는 박해를 받게될 것인데 이러한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박해를 하는 사람들은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 것도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사람의 영혼에 대한 권한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가장 작은 일까지도 모두 알고 계시고 우리들을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하느님께서 세심하게 보살펴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유는 참새조차도 기억하시며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를 박해의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이 바로 대세를 거스르는 일인 것입니다. 용기가 필요하고 결단이 필요합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힘든 일이지만 이러한 힘든 일을 이겨내면 예수님께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이러한 노력과 희생을 증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의 상황이 어렵다고해서 믿음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줍니다.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 그 믿음 속 에서 더욱 대담해져야 하고 용감해져야 합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알려지는 믿음의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 세상적인 두려움을 넘어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믿음의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