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714
2016년 7월 2일 토요일
타협하지 않는 삶(마태 9, 14-17)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 다.(마태 9, 16-17)
타협하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이 아닙니다. 악과 선은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즉, 양립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두개를 다 갖고 싶어하는 욕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식당을 갈 때마다 메뉴를 선택하는데 어려움을 갖습니다. 이것 저것 다 먹고 싶기 때문입니다. 삶의 매 순간 순간을 지내면 인생의 지혜를 배웁니다. 선택과 포기의 기준을 잘 정해야 합니다.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먹기 위해서 저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헌것을 버리는 아까움에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에는 ‘예’ 아니면 ‘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새 천에다 헌 천을 덧대는 것과 같은 부분적인 변화는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삶이란 바로 어정쩡한 태도가 아닌 단호한 태도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전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외적으로 드러나는 삶에 관심을 두는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것은 자비를 실천하는 것(마태 9, 13)’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는 열과 정성을 다해서 열심히하였지만 하느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것을 찾아서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한 것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남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면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과 삶의 양식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합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참 뜻이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어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절제와 극기의 생활을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의 제자들도 극기와 단식의 생활에 익숙해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세례자 요한이 일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 29) 하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자신을 신랑친구로 묘사했었는데 이를 인용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와 같은 기쁜 곳에와서 단식을 하는 것은 기쁜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하더라도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좋은 일을 하더라도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단식을 하더라도 표시가 나지 않도록 화장을 하라고 하시는 그 가르침의 연장선 상에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새 천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는 것과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로 드십니다. 이 두 비유는 표현만 다르지 실제의 의미는 같습니다.
‘헌 옷’은 당시의 바리사이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실천했던 규정들이라면, ‘새 천’은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참된 의미는 예수님의 복음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리사이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의미하고 새부대는 교회를 의미할 것입니다. 오래된 포도주는 바리사이들의 가르침이고 헌 부대는 유대교를 의미할 것입니다. 유대교라는 헌 부대로서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기에 새 부대인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개혁이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옛 생각과 삶의 양식을 고집하면 새로운 것을 받아 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멀리할려는 것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위로부터의 태어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나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나는 자신이 변화되기를 두려워 하는가?’ 질문합니다. 나는 믿음과 삶을 분리시키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질문을 해 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제 자신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될 수 있는 축복을 주시도록 청하고자 합니다.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살을 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