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16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
2014년 3월 7일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장 6-7)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장 15)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이 있고 싫어하시는 단식이 있다고 합니다. 이 단식은 일종의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의 표시를 겉으로 드러내어 놓고 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겉이 화려한 사랑의 표시가 아닌 소박한 사랑이라도 내실이 있는 사랑의 실천을 말씀하십니다. 그 내실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과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실천적인 사랑의 모습이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양식을 굶주린 이들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분의 양식을 나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양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평소보다 덜 먹고 나누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련하게 떠도는 사람을 집에 맞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나에게 이해득실을 따져서 득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불쌍하게 떠도는 사람 즉 오히려 나의 것을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헐벗은 사람을 보면, 나의 것을 벗어서 덮어주는 사람입니다. 불쌍한 혈육을 보고 피하지 않고 떳떳하게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의 모습이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슬퍼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단식을 하더라도 화장을 하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좋아하십니다. 바로 단식의 표시를 내지 않고 하는 단식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참 이웃을 배려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신만 생각하게 되면 이웃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드러낼려고 하는 사람은 이웃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은 이렇게 이웃을 배려하는 삶, 약자를 보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살리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나를 죽이는 삶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삶이 바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