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2003년 12월 19일
언젠가 한국을 다녀오신 신자분께서 저에게 ‘매실연가’라는 매실 엑기스를 물에 타 마시라고 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분이 분명히 매실 엑기스이기에 어떻게 마셔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슴에도 불구하고 그 설명은 잊어 버리고 당연히 술을 선물로 주셨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포장 역시 술로 착각할 정도로 유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 부부가 아이를 출산하는 것을 도와 주고 애기 엄마의 산후 조리를
도와 주기 위해서 이 곳에 오셨던 부모님께서 당신의 집에 저를 초대 했었습니다. 평소에는 초대를 받아도
빈 손으로 방문하던 습관이 그 날 따라 빈 손으로 가기가 그래서 머리 속에 담아 두고 있던 ‘매실
주’를 기억해 내었습니다. 포장을 뜯지 않았기에 그냥 비닐
백에 담아서 갖고 갔습니다. 속으로는 평소에 집을 방문하더라도 빈 손으로 다니던 신부가 어느 집을 방문할
때는 선물을 갖고 갔다더라 하는 소문이 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시간 맞춰서 그 집에 도착하여 학생의 아버님과 함께 본인이 가져간 술을 뜯어서 한 잔을 하게 되었습니다. 술 잔을 들고 마셨는데 술 맛이 너무 달았습니다. 형제님을 쳐다
보니 그 분의 표정도 이상하고 아들의 표정도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혼연일체가 되어 이 술 맛이 이상하다고
하면서 술 병의 겉 표지를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상표의 이름 밑에 작은 글씨로 ‘매실 엑기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아 이것이 매실 엑기스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한 바탕
웃었습니다. 속으로 챙피해서 혼이 났습니다. 그냥 빈 손으로
갔었으면 아무런 일도 없었을 터인데 하지 않던 일을 하다가 사고만 친 격이 되었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또 한 번의 엽기적인 사건을 치렀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이지만 얼마나 많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을 만들지 본인 자신도 모릅니다. 이렇게 실수
뭉치로 살아가는 본인이 만약에 신부가 아니고 가정을 꾸리는 가장이었으면 하고 생각하면 갑자기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 오릅니다. 그 가정의 꼴은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혼자서 살아가는 사제이기에 중차대한 실수가 아니면 그냥 웃고 넘어가 주시는 형제 자매님들의 분에 넘치는
아량에 힘입어 오늘도 고개를 들고 뻔뻔스럽게 살아갈 수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무리 부족한 존재라
할지라도 그 존재에게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제가 되기를 거부하고
부정했던 본인이 이렇게 사제로서 살아 가는 것은 바로 그분의 특별한 은총과 도우심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지금 이 순간도 그분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금년 한 해를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머리 속에
지나가는 생각은 ‘니가 지금 그런 사치스런 생각을 할 때냐? 다가
오는 피정을 무사히 끝내는 것이 바로 한 해를 잘 마무리 하는 것이니 잊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한가하게 앉아서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그 시간이 있다면 어쩌면 자신의 분수를 너머 선 계획을 세우게 될
것인데 그러한 자유를 피정에로 돌릴 수 있는 것도 참으로 의미 있는 한 해의 마무리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언제나 누구에게나 감사할 수 있는 겸손한 사제가 될 수 있기를 새해의 소망으로 가져 봅니다. 이 한해도 부족한 저를 당신의 품안에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