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 가해
2014년 1월 29일 수요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마태
5,1-12)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 3)
‘행복’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여러가지의 질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행복’의 정의로부터
시작하여 ‘어떻게’라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행복과 일반 세속인들이 생각하는 행복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태도나 시각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행복’과 일반인이 생각하는 ‘행복’은 너무나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은 ‘포기’와 ‘놓음’ 그리고 ‘낮아짐’과 ‘나눔’을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들의 이면에는 바로 그리스도가 그러한 삶을 살아갔고 우리에게도 그러한 삶을 살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행복에 이르는 길은 바로 그분께서 가셨던
‘십가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인은 누구도 이러한 ‘십자가의 길’이나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그러한 가르침이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그러한 가르침의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상에서의 최대의 행복을 만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값비싼 음식을 먹고 화려한 집에 사는 것 등등. 이러한 것들이 참된 행복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전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의 핵심은 참된 행복이란 무엇이며 이러한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 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행복함을 느끼는 순간은 나의 삶의 중심이 자신이 아닌
하느님일 때 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삶의 중심이 되신다는 것은 벌써 자신의 내부에 하늘나라가 존재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삶을 통해서 바로 아버지께서 중심이 되시는 삶이 어떠한 삶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은 봉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하러 왔다.’는 말씀이나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등의 말씀들을 통해서 보통 일반인이 추구하는 외적인 화려함에서 오는 ‘행복함’의 불완전성을 잘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타인과의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서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행복의 추구는 언제나 불행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행복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행복지수에 만족하고 있을 지 모르나 이러한 행복지수가 어느
순간에 누구에 의해서 깨어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 선언’의
시작에서 ‘가난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가난한 마음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며 살아가는 마음을 말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참으로 부족하고 상식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지라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된 그 행복은
참으로 완전하고 변하지 않는 항구적인 행복을 우리에게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소유할려는 마음과 포기하는 마음은 종이 한장의 차이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상반된 삶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에 삶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삶의 차이는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아감을 통해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이 바로 우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해 갈 것임을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 공 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을 만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첫
번째 전도여행에서 “온 갈릴레아를 두루 다니시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갖가지 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과 마귀들린 사람들과 간질병자들과 중풍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다(마태
4:23-24)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그러한 외적인 치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군중이 모여들자, 예수께서는 이제까지 인간이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던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이것이 산에서 이루어진 가르침이기에 산상수훈 혹은 산상설교(山上說敎)라고도
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주시는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이 산에서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산상수훈’(마태 5-7장)이라고 말합니다. 루카복음
사가는 이 가르침이 평지에서 일어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평지설교’라고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에 이르는 8가지의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 가르침의 시작도 마침도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만큼 ‘가난한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이 8가지의 참행복에 이르는 길을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첫 번째의 행복선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늘나라가 바로 그들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스에는 '가난'이라는 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Penes'(페네스)라는 말이 있고 또 하나는'Ptochos'(프토코스)라는 말인데 먼저, 페네스 는 노동을 해야 먹을 수 있는 가난을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끼니 걱정은 없습니다.
다음에는 'Ptochos'(프토코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절대빈곤을 말합니다. 사흘에 한 끼 먹기도
어려운 자들입니다. 거지 라자로 (루가 16,19~31참조)처럼
누가 돌봐 줄 이도 없고 그렇다고 제 손으로 벌어먹지도 못하는 극심한 가난을 말합니다. 즉 남의 도움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그러한 간난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바로 이 프토코스를 말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동사는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이라도 하느님이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늘나라가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행복선언은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슬퍼한다고
다 위로롤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슬퍼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하다고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을
보고서 슬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두고 슬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동사의 시제를
보면, 슬퍼하는 것은 현재형입니다. 그리고 그 보상은 미래입니다. 그런데 현재 행복하다고 합니다.
이 동사의 시재형에 관심을 두면 비록 지금 슬퍼해도 미래에 이루어질 일 때문에 지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것은 과거의 일어난 일 때문이나 현재의 일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슬퍼지만 그 슬픔은 축복받은 슬픔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위로가 보장된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의 행복선언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주님안에서 성실한 삶을 통해서 얻게되는
열매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따듯한 마음을 뜻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은 하느님의 땅을 차지 할 것이라고 합니다.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상속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곧 하느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바로 아들 됨의 성품입니다.
네번째는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현재 하느님의 세상적인 정의의 개념을 넘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말합니다. ‘거룩함’에 대한 열망입니다. 이러한
열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에는 만족하게 될 것이기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자비로운 사람’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기에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을 입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입을 사람입니다. 행복합니다.
여섯번 째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이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보게될 것입니다. 세속에
물든 마음, 세상적인 출세나 물욕이나 권력과 명예에 물든 마음이 아닙니다. 세상을 넘어선 마음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넘어선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일곱 번째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이유는 하느님의 자녀랄 불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상속 받는 살람은 자녀입니다. 따라서 땅을 상속 받는 사람도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평화를 이루는 사람과 온유한 사람’은 동일한 성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결국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일 것입니다.
여덟번 째의 행복은 바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첫 번째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받는 선물과 동일한 선물을 받습니다. ‘하늘나라’입니다
이 진복팔단은 결국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갖게 되는 행복으로 귀결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마음이 가난함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해결의 종작점이 바로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지향점이 참 행복이라면 그 행복의 길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이 가난한 마음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살아가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
마음이 우리를 참 행복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향해서 살아가다 보면, 이 8가지의 행복은 저절로 우리에게 오게될 것입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마음이 가난한 삶’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