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의
삶의 양식
루카 6,27-38
원수를 용서하는
것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 이 두 말은 다 하느님으로부터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둘을 실천하셨습니다. 동시에 인간이 되신 말씀 역시 이를 실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용서도 하고 사랑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잘못은 참으로 기쁘게 용서하고 받아들입니다. 관대하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과
용서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축복해주고 오른 쪽 빰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쪽 뺨을 내어 주어라고 하십니다. 오십리를 가자하면 백리를 가주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용서와 사랑에 포함된 행동양식입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불가능한 행동양식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몇번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일곱번의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한히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깨닫습니다. 용서의 질도 용서의
양도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닫습니다.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느님의
능력이면 가능합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는 삶, 하느님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에수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회의
창립자이신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예수회원은 죄인이다.’ 라고 예수회의 회헌에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면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면 타인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용서를
받고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나의 이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용서함의 실천도, 사랑의 실천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한번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습니다. 내가 용서할 때 바로 그 순간에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내가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