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852
2016년 12월 9일 금요일
예수님의 마음을 읽는 지혜 (마태 11,16-19)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 16-17))
요즈음 고국의 뉴스를 접하면 참으로 답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정의는 강물같이 흐르는데 사랑은 없고 이기심 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던 말이 있습니다. ‘맞고 할래, 안 맞고 할래’ 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맞지 않고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꼭 맞고서 한다는데 있습니다. 조금만 자신을 죽이면 되는데 자신의 노예로 살다가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는데 있습니다. 이럴 때 제가 그리스도인을 산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자유하며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저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살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면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판단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에 일반 상식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아도 답답한 이 사회를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답답해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모습일까 반문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서 회개를 하여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굳어서 일반 민중들과는 달리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도 받지 않고 자신들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인 하느님의 뜻을 물리칩니다. 이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하시는 말씀은 이들에 대한 극도의 안타까움의 표현으로 느껴집니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참으로 예수님의 이러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완고한 고집을 신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옳음을 옳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정해 놓은 그러한 사고의 틀을 부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나는 이러한 고집을 나는 나의 소신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며 자신을 돌아봅니다.
이러한 사람들, 즉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비롯해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배척하고 비웃는 사람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 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 32)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이들은 장텨에서 이 놀이를 할까 저 놀이를 할까, 하며 서로 다투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피를 불고 춤을 추는 것은 결혼식을 흉내내는 놀이이고 곡을 하고 우는 것은 장례식을 흉내내고 있는 놀이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금욕주의자인 요한에게는 춤을 추라고 요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님께는 곡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청개구리와 같은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희브리서 12장 2절의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 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 쪽에 앉으셨습니다.” 하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의 원천이시고 이유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뜻과 하느님의 오른 쪽에 앉으신다는 그 기쁨으로 세상이 주는 가장 모욕적인 형벌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수치를 수치로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당하는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이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살다가 내가 당하는 수치는 수치가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용기를 갖게 합니다. 이 믿음은 세상적인 기준을 넘어서게 합니다. 오로지 하느님 만을 보고 살아가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수 많은 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사랑 만은 영원히 남아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만이 모든 은사의 존재의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모든 답은 그곳에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주님 안에서 옳음을 보고 옳다고 할 수 있고 그름을 보고 그르다고 할 수 있는 용기’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 를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