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937
2017년 3월 18일 토요일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15,1-3.11ㄴ-32)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 31)
탕자의 비유는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알려줍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관계는 갑과 을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관계입니다.
어둠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상적인 명예보다는 영적인 신앙관계를 살아가도록 초대합니다.
오늘 아침에
저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달리 표현하면 ‘믿음은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복음의 ‘탕자의 비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둘째 아들의 회심에 관심을 둡니다. 그런데 아들의 돌아옴도
중요하지만 아들을 떠나 보낸 아버지의 마음을 느껴 본다면 그렇게 쉽게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아버지 저에게
주실 유산을 미리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그냥 성경은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 말이 나오기까지 많은 사건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이 아이가 벌써 내가 죽기를 원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수도 있고 이 아이는 아버지인 나보다는 돈에
더 관심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덧붙여서
이 아들은 아버지가 나누어 주는 자신의 몫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 ‘모두’라는 말과 ‘먼 고장’이라는 말이 강하게 다가옵니다. 왜 복음서는 ‘모두’와 ‘먼’을 강조할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 이 아들은 아버지와 완전한 결별을 원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 하는 삶이 자신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었으면 이렇게 아버지의 시야에서 완전히 떠나고 아버지의 흔적을 남기지 않게 모든 것을 걷어서 떠났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우리가 하느님
종으로 살면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만 하느님을 떠나면 그 떠난 이유의 종이 되어 살아야 함을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지을 자유까지
보장해 주셨지만 세상은 우리를 자신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아들은 세상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세상에는 존재가치는 없고 소유가치만 존재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사라지고
인간의 모습만 존재합니다. 세상에서의 자유란 타락을 말합니다. 이 자유를
만끽한 아들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됩니다. 그가 살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임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지만 머뭇거리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받을 줄 것인가? 용서해 주실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그러한 아들의 닫혀진 마음과는 달리 그가 떠난 뒤에도 아들을 향하여 당신의 마음을 열어놓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줄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강제로 돌아오게 하실수도
있지만 그에게 선택할 자유를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의
큰 사랑의 절정은 아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스스로 돌아오기를 애태우며 기다림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용서였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으로 아들의 모든 잘못은 덮어졌고 자신의 모든 것이 회복 되었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닫혀진 마음으로 살아가면 아버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아버지는 없고 자신을 구속하는 아버지만 보입니다. 벌하고 야단치는
아버지만 보입니다. 마음을 열고 아버지를
바라보면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돌아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세상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하루, 하느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는 하루를 살도록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