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686
2016년 5월 31일 화요일
자신의 삶을 내세우지 않는 삶의 행복(루카 1,39-56)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5)
우리의 삶은 찾아가기도 하도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상황에 따른 분별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분별의 기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결정이 아닌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결정이 중요합니다.
오늘 저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께서 당신의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당연히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방문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어머니들과 자식들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 만남의 주도권을 성모님께서 쥐십니다. 당신의 삶이 바로 예수님을 위한 삶이 될 것임을 확인해 주십니다.
성모님의 삶의 전형은 겸손과 기다림의 삶입니다. 믿음과 확신의 삶입니다. 이러한 단어들은 바로 미래의 불확실함을, 인간의 유한함을 넘어가게 합니다. 인간적인 삶의 논리를 하느님의 삶의 논리로 바꾸어 줍니다. 오늘 성모님의 모습은 ‘찾아가시는 분’이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찾아 오기를 원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찾아 간다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삶이지만 찾아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성모님께서도 오늘 엘리사벳을 찾아가십니다. 위로부터 거듭남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삶에서 찾아 가는 삶으로의 전환인가 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던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죄에 물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는 그 사건이 바로 찾아 오는 삶의 최고의 절정입니다. 오신 그분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습니다. 경배하는 그 마음에 이제 파견을 느낍니다. 오신 그분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찾아가는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찾아가는 사람이 어떠한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동시에 당신을 찾아 온 사람을 맞는 엘리사벳은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해야 하나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찾아 가는 삶과 찾아 오는 사람을 맞이하는 삶은 기적을 만들어갑니다. 이러한 삶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 진다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합니다. 태 안에 있는 아이까지 기뻐서 뛰어 놀게 합니다. 그리고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하고 외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하는 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에게 찾아 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따뜻한 마음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믿음을 갖고 오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합니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에게 하느님의 참 구원의 메시지를 확인시켜 주십니다. 믿음 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축복이라면 이 축복에 응답하는 것이 봉헌일 것입니다. 교만의 절정이 죽음이라면 겸손의 절정은 생명일 것입니다. 교만이 소유를 의미한다면 겸손은 봉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축복이라면 성모님의 비움과 순명은 바로 봉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은 ‘마리아의 노래’ 로 알려진 성모님의 노래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라틴어로 ‘마니피캇’이라고 하는데 ‘내가 칭송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노래의 내용 중에는 시편과 예언서, 또 사무엘 상권의 한나의 찬가 등을 인용하거나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루카가 당시 유대인들의 찬미가를 인용해서 마리아의 노래로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그냥 가설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노래의 시작은 바로 가브리엘 천사의 잉태예고 때 놀라움과 두려움과 당황했던 마리아가 이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선택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마음으로부터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서 뛰시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비천한 자신을 굽어 보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굽어 본다’는 의미는 참으로 가난하고 비천했던 마리아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은혜로 말미암아 마리아는 모든 세대로부터 행복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 은혜는 바로 하느님께서 마리아께 큰 일을 하셨기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큰일'은 예수님께서 하시게 될 인류 구원사업을 뜻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 라는 말은 그 큰일을 하기 위해서 한 시골 처녀인 마리아를 메시아의 어머니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구절은 하느님의 전능 하신 능력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시는 일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음을 찬양 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것과 개인적인 일의 순서를 바꾸는 삶을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교만한 자를 흩으셨다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은 죽음을 낳고 순명은 생명을 얻게 할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축복과 응답은 모두가 사랑에서 출발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서 감사와 찬미가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노래를 통해서 하느님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보게 됩니다. 겸손함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러해야 함을 성모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 52-53). 는 말씀을 통해서 통치하는 왕이 아닌 섬기는 왕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암시하시고 굶주린 이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불의하게 부자가 된 사람들을 내치시는 예수님의 상을 상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삶의 매 순간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결정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기초한 결정을 내릴 수 있기를, 하느님의 축복에 응답하는 성모님의 겸손과 순명의 정신이 나의 삶이 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