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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6-17 00:15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 24-34) - 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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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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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702

2016년 6월 18일 토요일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 24-3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 24)

탈출기 12장 51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부대로 편성하여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민족은 오합지졸에 불과했지만 하느님께서 이끌어내신 그 민족은 이제는 하느님의 군대가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는 이제는 하느님의 군대가 됩니다. 바로 이 군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먼저 찾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저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니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나만을 따라라. 내가 너를 밤낮으로 그 고난의 질곡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너에게 길을 인도하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너를 인도할 것이다.(탈출 13, 21)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바로 말씀과 성령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코린 후 12, 10) 하고 말씀하시나 봅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두려움과 불안이 없습니다. 낮아지고 또 낮아지면서도 그 낮아짐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약하게 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기에 오히려 기뻐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강함이 아닌 내적인 강함입니다. 내가 참으로 강한 존재이기에 약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질문을 하며 살아갑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깨어있슴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질문이 있고 세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 24)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질문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선택하며 살아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 순간 순간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질문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두 마음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선을 선택하는 마음과 악을 선택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을 주인으로 삼는 마음과 하느님을 주인으로 삼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마음보다는 세상을 주인으로 모시는 마음이 우선됨을 압니다. 세상의 것은 그냥 선택하면 되지만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의지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의지적인 결단이 의미하는 것은 포기와 선택을 해야하는 주체가 바로 나임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이 주인인 나라를 찾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분의 본질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 1서는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이러한 선택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바로 이러한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사랑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자유하는 삶은 세상을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안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삶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당신과 우리는 분리가 아닌 당신이 주인인 세상에서 우리를 살게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교만함이나 나약함은 사탄의 유혹으로 하느님과 세상을 분리시키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의 품 안에 안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존재는 모든 것은 하느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수단이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과 재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 34)

우리 인간이 아무리 걱정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수명을 한 순간도 늘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다 당연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걱정을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내일 걱정을 내일이하게 내버려 둘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변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똑 같은 말씀입니다. 하루의 양식만 갖는다는 것은 바로 지금은 나의 시간이지만 앞으로의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내일 걱정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내일 일은 하느님께서 책임지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약속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야 한답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든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된다고 합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이러한 순서를 바꾸게 유혹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느님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 눈 앞에 보이는 재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선택하는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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