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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0-25 05:37
   영원한 생명을 사는 삶의 지혜(루카 13, 22-30) -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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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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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 814

2016년 10월 26일 수요일

영원한 생명을 사는 삶의 지혜(루카 13, 22-30)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 22)

자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한계의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육적인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백세 인생을 살아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생명은 늘어났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육적인 생명은 연장이 되었지만 그 생명을 채워갈 내용이 고갈된 것입니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인 가에 따라서 행복의 질이 달라질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8장 2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서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만 딱 떼어 자주 인용하고 사용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말은 그 전에 있는 조건을 잘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 에게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이란 바로 우리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하느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그래서 이 두 말은 다르게 쓰여진 동어반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던 이 두 조건의 사람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가끔 자신에게 ‘나는 하느님 때문에 세상적인 것을 기쁘게 포기할 수 있는?’ 하고 질문을 해 봅니다. 가끔은 ‘예’하고 답을 머뭇거리지 않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이 포기의 삶이 항구적이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 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 보면, 나의 신앙은 하느님 중심이기 보다는 내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불린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분의 부르심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아프지만 고백해야 합니다. 

요구하는 사랑은 해 왔지만 베푸는 사랑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도 ‘기복적인 기도’는 많이 해왔지만 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기도에는 참으로 인색했습니다. 살면서도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 아닌 내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왔슴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 봅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이제는 참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하느님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나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에서 하는 것인지를 미리 따져보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질문을 합니다.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질문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기 전에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여러지역을 지나 가시면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들으면서 스스로 ‘저분의 가르침대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구나.’ 하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긍정의 질문보다는 부정의 질문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의 질문하는 모습이  바로 내가 하는 질문을 대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예수님의 대답도 역시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어렴풋이 알 것 같은데 딱 집어서 말하기가 힘이듭니다. 이말은 확실하게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힌트가 오늘 복음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30절을 보면,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이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꼴찌인 사람, 첫째인 사람 , 이들의 순서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첫째이기 위해서 살아가거나 첫째인 사람이 꼴찌가  되거나 된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세상적으로 꼴찌로 살아가는 사람이 첫째가 되거나 첫째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첫째가 되고 꼴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인 것입니다.

지금 첫째인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꼴찌로 살아가라는 것인데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자신을 포기하고 내어놓아야 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러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좁은 문’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적으로 첫째가 되는 욕망을 버리는 것, 하느님 안에서 첫째가 되는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바로 그것이 ‘좁은 문’을 의미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는 좁은 길을 선택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인 구원을 얻게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살기 위해서 한계적인 생명을 포기하는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 세상에서 영원을 추구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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