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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6-14 13:23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요한 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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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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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대축일 강론
2014년 6월 15일 일요일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6-17)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 6-8)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 16)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이렇게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하느님의 이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전달 되었으면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고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기에 인격이란 이제 우리에게서 조금씩 사라져가는 단어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간직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의 표현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성자의 사랑을 느껴보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시지 않고 당신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분이십니다.
성자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시면서 우리에게 우리의 ‘보호자’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이 성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또 다른 존재양식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도록 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은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 사랑의 신비를 체험하고  이 신비로운 사랑을 우리의 삶 안에서도 실현하고자 다짐하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전례적으로 지난 주일까지 부활시기를 보내고 다시 연중시기를 맞이해서 그 첫 주일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리에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앙으로만 받아 들여야 하는 여러 가지의 교리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예가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이고 이외에도 성모님의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잉태 등을 들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들을 교회에서는 ‘믿을교리’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신부나 교리를 가르치는 교리교사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질문 중의 하나가 ‘삼위일체’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성적이며 합리성을 추구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하느님은 세 위격이시지만 세 하느님이 아니고 한 분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완전한 하느님을 자신의 지성으로 완전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유한함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열어 보여 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심을 우리는 ‘계시’라고 말하며 우리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계시종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통 삼위일체 교리는 4세기말에 형성됐는데, ‘하느님은 각기 구별되는 세 위격, 성부·성자·성령으로 이뤄져 있지만 한분이신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이 위격들은 ‘선·후나 높고 낮음이 없이 똑같은 신성을 지니지만 세분의 하느님이 아니라 오직 한분이신 하느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힌트를 얻어, 삼위일체의 신비를 인간 영혼의 세가지 속성인 기억, 인식, 사랑과 연관지어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기억, 인식, 사랑이 하나의 인간 영혼을 이루듯 성부·성자·성령이 한 하느님을 이루고 있다는 것으로 이 신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를 하느님과 인간 역사와의 구체적인 관계에서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유명한 예수회 신학자인 칼 라너(Karl Rahner)에 따르면 ‘사랑이신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안에 폐쇄된 채 머무르지 않고 항상 당신 자신을 외부로 드러내고자 한다.’ 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부는 인간 역사안에서 당신 자신을 전달하려는 주체이며 이 자기전달의 절정이 바로 성자이며. 그리고 이 자기전달을 주도하는 사랑의 원리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를 꿰뚫고 있으며 우리를 ‘창조’(성부)하시고 ‘구원’(성자)하시며 ‘완성에로 이끄시는’(성령) 사랑의 하느님을 계시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 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에 대해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묵상을 통해서 많은 은총과 새로운 이해를 체험하게 될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삼위일체’를 체험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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