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시간이 간다는 사실이 아쉽기 시작했습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냥 지나갑니다.
가끔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게 된 것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가 하고 스스로 질문을 해 봅니다. 어린 시절, 내가 왜 태어났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질문의 이면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이 많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주어진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이렇게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도 극도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던 인간에서 이제는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가는
인간으로의 변화가 바로 성숙하는 인간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자신의 성숙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많지 않음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냥 자신의 환경에 순응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 이순간까지 어떠한 변화의 삶도 살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성숙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는
삶의 전형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합니다. 어떠한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그 상황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닫혀진 삶을 강요해도 그리스도인들은 무한히 열린 삶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무한을 바라보기에 참으로 작아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열려진 미래를
바라보기에 온전히 자신을 비울 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한히 높은 곳을 지향하기에 무한히 낮아질 수
있습니다.
또
한번의 여름을 맞이하면서 시간이 감을 아쉬워함은 닫혀진 미래를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제나 열려진
영원을 그리워한다고 하면서도 이곳에서의 삶에 미련을 갖는 것은 아직은 성숙할 가능성이 있는 신앙인이기에 그렇다고 스스로 자위해 봅니다.
참으로
낮아짐의 극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기대하지 않는 삶일 것입니다. 어떠한 것도 원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 놓을 수 있는 삶일 것입니다. 이렇게 온전히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삶은 온전히 자신을 완전자에게 의탁하며 살아갈 때 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바로 어떠한 바램도
없이 자신의 전 존재를 완전자에게 내어 놓는 삶을 살아가는 삶 안에서 만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시간이 가면 닫혀진 시간 안에서 자신을 가두어 두기보다는 열려진 시간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삶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아무려면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희망으로 지금 이 순간의 부족함을 주님께 내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