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30주간 미사
2015년 10월 25일 일요일
다시 보게해 주십시오(마르 10, 46-52)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 십시오." (마르 10, 51)
장애의 경험을 해 보지 못하면 장애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힘들고 답답하게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한국사회는 참으로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입니다.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저 또한 장애인들에 대한 많은 편견을 갖고 살아왔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장애를 갖고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께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갖고 계시는 그 따뜻한 마음을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들과 함께 예리코를 떠나가실 때에 길가에 바르티매오라고 불리는 눈먼 거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 보다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야기들이 대다수였을 것입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케하는 이야기들 이었을 것입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는데 군중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소리를 듣고서 무슨 일인가 물어 봅니다. 죽음의 언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어느 날 이 사람은 생명의 언어를 듣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이 만나기를 고대했던 바로 그분이 나자렛 예수님께서 지나 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순간 그는 삶의 희망을 가집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간절히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하고 두 번씩이나 부릅니다. 뒤에 덧붙인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당신이 주님이십니다. 하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메시아 이시고 그리스도 이십니다 하고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사 35, 5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내가 낮아졌다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외칩니다.
이 간절한 외침이 기도로 들려옵니다. 간절한 그의 외침이 가슴에 아려옵니다. 나는 이렇게 간절하게 주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했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의 외침이 나도 이제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잠자코 있어라고 야단을 칩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사람들의 꾸짖음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더욱 크게 외칩니다. 마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으로부터 여러자지 비판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비판에 직면해서 더욱 작아지는 우리에게 더욱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라고 깨우쳐 주는 것 같습니다. 비판에 직면하면 할수록 더욱 굳건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줄아는 그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함을 깨우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 우리가 부르짖고 당신께 나아가면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심을 보여주십니다. 그의 부르짖음 속에 이미 그의 믿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다시’라는 말이 저의 마음을 때립니다. 이 맹인은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시력을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삶을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에 보지를 못했다면 그렇게 답답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본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본다는 것의 좋음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욱 답답했을 것입니다. ‘다시’라는 말이 저의 마음을 때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답답함을 해결해 줄 수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크게 ‘다시 보게해 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오로지 의탁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글을 쓰면서 저도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하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질문을 저에게 해 봅니다. 나는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가?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하는 이 말씀이 저의 답이기를 원합니다.
바르티메오는 자신의 실존 전체를 걸고서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대답 속에서 그의 간절한 마음을 보십니다. 믿음을 보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즉시 보게된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에수님을 따릅니다.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집니다. 이 드라마가 나에게 주는 감동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합니다. 나병을 치유받고 간 사람은 아홉이었지만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한 사람이 생각납니다. 이 맹인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나도 돌아와서 친미와 감사를 드리는 나병환자와 보게된 즉시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바르티메오와 같은 믿음의 삶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그러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묵시 2, 3)는 이 말씀이 나의 삶 안에서 실현되는 믿음의 살을 살고자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