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간 강론
2015년 3월 15일 일요일
존재로서의 삶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6-17)
사랑이 그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노와 증오와 미움이 불길처럼 타오르는 사회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존귀함을 포기하는 사회를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으로서 우리를 창조하셨는데 인간은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죄를 선택함으로서 하느님의 모상을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는 존재의 가치를 인간은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둠으로서 자신의 무한한 귀함을 상실하고 자신의 귀함을 소유함으로서 외부에 그 가치를 과시함으로서 찾을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의미가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돈과 명예과 권력등과 같은 것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귀한 존재이기를 포기함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는 사라지고 이제는 외부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포기하고 외부로 부터 소유를 통해서 자신의 존귀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예전에는 ‘내 탓이야’를 고백할 줄 아는 존재였는데 이제는 내 탓은 사라지고 ‘네 탓이야’로 남을 탓하는 존재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사고는 이 세상을 병들게 하고 자신을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병든 존재를 치료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극치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극치가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십자가는 소유가치를 다시금 존재 가치로 우리의 생각을 바꾸에 하시는 것이입니다. 십자가를 보면 횡으로 종으로 만나는 교차점이 있습니다. 그 교차점을 통해서 좌우 상하로 연결이 됩니다. 이 교차점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이웃을 만나게 하고 동시에 우리와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코린 전 1, 22-23)말씀이 떠오릅니다.
유다인에게는 걸림돌이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말로 보면 ‘스칸달론(σκανδαλον)’ 이라고 합니다. 이 ‘스칼달론’ 이라는 말에서 스캔들(Scandal)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걸림돌’ 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수난 당하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무능력하고 비참하게 십자가 상에서 죽어가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나 다윗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혜란 이성의 합리적인 사고를 통한 철학적 이해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철학적 전통을 가졌다는 자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유명한 지식인이 있었는데, 나자렛이라는 촌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과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모순 중의 모순이며 미련한 것 중의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을 조롱했습니다.따라서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는 걸림돌이고 어리석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참 메시아를 발견하고 이 십자가를 통해서 참 지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참과 거짓의 경계에 서서 상황에 따라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분명한 대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 하느님이기를 포기하는 이유를 묵상해 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그를 믿는 이들을 멸망하지 않게 하신 이유는 바로 ‘세상에 대한 극진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은 모든 문제의 해결사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이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와 닿을 때 ‘십자가’의 신비가 풀리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형틀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한 삶으로 가는 가교인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의 형틀을 영원한 삶의 가교로 만드는 것입니다.십자가를 통해서 큰 사랑을 받았기에 큰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큰 사랑을 느꼈기에 큰 사랑을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면 하느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어떠한 것도 하느님 앞에서는 아깝지가 않습니다. 사랑에는 따짐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기 싫으니까 이성적인 따짐으로 합리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비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을수 있었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았던 마리아의 모습이 바로 참으로 자신의 죄를 탕감받은 죄인이 하느님께 드릴수 있는 최선의 감사의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