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삶
지난 주에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13,3-9)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씨가 떨어진 땅이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면 씨는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백배 천배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 땅에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좋은 땅이 되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어서 하늘나라를 가라지, 겨자씨, 누룩 등 세가지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와 사회적인 배경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로마의 탄압에 시달리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자신들 만의 순수한 공동체를 건설하고자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죄인들의 제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죄인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기도 하고 병자들을 치료해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것을 비유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밀밭에 뿌려진 가라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씨가 좋은 땅에 뿌려졌는데 밀과 가라지가 섞여 나왔다는 것입니다.이 밀과 가라지는 서로 엉켜있어서 가라지를 뽑을려고 하다가 밀까지 뽑는 우를 범하게 되므로 추수 때까지 즉 심판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슴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 대해서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라고 설명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도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인지 아니면 나쁜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가 속해있는 교회 안에서도 당연히 좋은 사람들도 있고 나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이를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발견합니다.
사형제도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이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인간의 부족함으로 무고한 사람이 사형을 언도받고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법원에서 유죄로 판명된 사람이 시간이 지나서 자신의 혐의를 벗고 무죄가 되는 경우가 있슴을 언론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이들이 만약에 무고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이 집행되었다면 이에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하겠습니까? 그러한 대상에 나도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도 시간이 가면서 회개한 사람도 있고 또한 반대의 경우도 있슴을 우리는 잘압니다. 한국 교회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한 명의 순교자 뒤에는 세 명의 배교자가 있었고, 배교한 사람들이 회개하여 다시 순교자가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그렇게 박해하던 사울도 나중에 회개하여 사도 바오로가 되어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전하지 않았습니까? 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어떠했습니까? 어머니인 성녀 모니카의 간절한 기도와 기다림 속에, 그는 성 암브로시오의 강론을 듣고 회심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는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완전히 변화하여 대성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만약 성녀 모니카가 조급하게 생각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 세상에 밝음보다는 어둠이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파렴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온갖 악의 세력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악의 세력을 당신의 권능으로 일시에 제거치 않는 것은 그들의 참다운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께 귀속된 것입니다. 악을 우리가 악으로 갚으려 해서도 안되며 지금 당장 선이 보상을 못 받는다 해도 서운해 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인내와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