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31주간 강론
2016년 10월 30일 일요일
하늘나라의 모습(루카 19,1-10)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 9)
아침에 일어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저의 믿음에 대해서. 너는 선과 악에 경계에 서서 매 순간 순간마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옮겨 다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느냐? 하시며 질문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의 믿음은 뜨거움과 차가움의 경계에서 차가움에 속하는가 뜨거움에 속하는가? 미지근한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을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고 하시는 말씀 앞에서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언제나 저희들에게 “예” 아니면 “아니오”의 답을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예”라고 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 고 말합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문제의 총체적인 합이 인간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가 이렇게 어수순하고 국민을 좌절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게 하고 경직된 남북 분단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의 결과의 단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질문을 해 봅니다. ‘왜 세상이 바뀌어야 할까?” 이 어두운 세상의 문제가 나를 제외한 사람들의 잘못에 결과하는 것처럼 모두들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어야 하면 어떠한 모습으로의 세상을 말할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여당이 지향하는 세상, 야당이 지향하는 세상의 모습은 다릅니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과 이들이 생각하는 세상은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적인 논리로 미래의 이상적인 세상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보지만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이 다른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불가능함을 우리는 압니다. 그 이유는 바로 남의 눈에 든 티끌을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내 탓이 아닌 네 탓으로 출발하는 것이기에 하나된 세상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는 세상은 지금의 세상의 모든 문제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자기 고백에서 출발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네 탓이 아닌 나의 탓에서 출발하기에 자신을 먼저 바라봅니다. 회개합니다. 이 회개의 모습은 그냥 결과를 탓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죄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입니다. 불가능 하기에 절대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의 회개는 우리가 해야하는 회개의 모습의 좋은 모범이 될 것입니다. 시편 51편에서 그 답을 찾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나라는 하늘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공간의 개념이 아닌 통치의 개념입니다. 마태오 복음 20장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20,1)고 말씀하십니다. 포도밭 주인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바로 이 사람을 지배하는 그 생각이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는 무슨 생각을 갖고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두고 하늘나라와 같다고 말씀하실까요? 참으로 세상적인 논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을 하는 주인입니다.
이른 아침에 데려온 일꾼들과 하루 일을 하면 1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계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거의 매 시간마다 장터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겠다고 하면서 일꾼들을 데려옵니다. 그리고는 오후 다섯시에도 데려옵니다. 그런데 이해하기가 힘든 것은 품삯을 치를 때 일어납니다. 아침부터 일을 한 사람에게도 오후 다섯 시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도 동일한 품삭을 지불합니다.
세상적인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하고 있는 그 주인이 ‘하늘나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이해가 안되는 것을 이제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고정관념을 깨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해가 되는 것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사자와 염소가 함께 뛰어놀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한 세상은 차가운 이성의 눈이 아닌 따뜻한 마음의 눈으로 바라 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이고 세관장인 자캐오의 집에 가십니다. 죄인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시겠답니다. 당시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포도밭 주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장터에서 오후 다섯 시까지 일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포도밭 주인이 포도밭의 경영을 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을 찾아서 데려와서 일을 시키기 위해서 경영하는 포도밭인 것입니다. 이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 포도밭을 경영하는 주인의 그 마음이 바로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자캐오는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맞이 하면서 잘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에수님을 찾는 마음에서 이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그 마음 속에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습니다. 구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찾는 하늘나라의 모습입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요한 묵시 3, 15-16) 는 말씀을 간직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가 사는 한주간이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