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공현 대축일을 지내면서
2015년 1월 4일 일요일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바치는 삶(마태 2, 1-12)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마태 2, 6)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 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또 하나의 ‘성탄 대축일’이라고도 합니다.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간 것을 기념하는 날로, 이를 통하여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탄생이 세상에 공식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성탄에서 우리는 한 어린 생명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념하였습니다. 그 어린 생명은 자라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공현 축일은 그 생명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기사가 아닙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왔다는 오늘의 이야기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예수님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거부하였고, 이교도들이 먼 이역에서 찾아 와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활동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후 그분의 가르침은 이방인들에게 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동방박사들이 왔다고 기록한 복음서는 마태오 복음서가 유일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동방박사의 예수님 경배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사가 만이 갖고 있었던 고유한 자료에 의 한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루까 복음서는 목자들이 예수님을 경배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루까 복음사가 만이 갖고 있었던 고유한 자료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서에는 중복된 내용들이 많습니다.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내용들도 있고, 두 세군데만 기록된 이야기가 있는데, 예수님을 경배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 번씩만 나옵니다. 그 이유는 마태오가 목자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이야기를 몰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루까가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것을 몰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각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과 대상이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을 대하는 상반된 두 부류의 사람을 보게 됩니다. 열려진 마음과 닫혀진 마음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이방인의 땅에서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그 지역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 만을 생각하며 예수님을 죽일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그들만이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는 오직 자신들만을 위한 메시야라고 믿었기 때문에 메시야는 자신들로부터 태어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에 젖어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저 멀리 이방인의 땅에서 온 동방박사들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오는 모습은 선택된 민족으로 생각했던 그들에게는 참으로 큰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동방박사들에게는 예수님의 탄생은 말 그대로 예언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신 기쁜 날이었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헤로데와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예수님의 탄생이 자신들의 몰락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신 것이 그들의 기득권을 빼앗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참된의미를 깨닫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닫혀진 마음으로는, 내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으로는, 자신의기득권을 소유할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닫혀진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기득권을 빼앗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시간과 물질을 빼앗긴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빼앗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마저도 우리를 위하여 주셨습니다.
이런 성탄의 의미가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빼앗고 소유하기 위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함께하며 생명을 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탄의 참의미이며 주님의 공생활의 참의미를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