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주일 강론
2016년 3월 20일 일요일
우리의 삶의 주관자이신 하느님(루카 22,14─23,56)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루카 22, 46)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준비를 시키십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수난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예수님의 순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나를 죽이면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시고 내가 나를 살리면 하느님께서 나를 죽이실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살리고 싶은 욕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자신을 죽이고 이웃을 살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기는 바로 자신을 죽이고 이웃을 살리는 삶의 전형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루카 22, 26)는 말씀을 몸소 실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살기위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깨어서 기도하는 삶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당시의 나귀는 가난한 사람들의 운송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초라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겉옷과 나무가지를 길에 깔고 성지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야훼, 구원하소서)’를 외치면서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이렇게 환영하던 군중들이 돌변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오’하고 외치는 폭도와 같은 모습으로 돌변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30닢에 팔아넘기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역시 예수님께서 체포되는 그 순간에 모두 도망갔습니다. 목숨을 걸고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수석제자였던 베드로 역시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은전 30닢에 팔아넘겼던 유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을 선고받는 그 순간에 자신의 행위를 후회합니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립니다. 베드로는 새벽 닭이 우는 그 순간에 참회의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후회와 회개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후회’는 바로 내가 잘못했구나 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는 삶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우리의 삶이 후회하는 삶에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후회에서 멈추었던 유다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하지만 ‘회개’했던 베드로는 지금의 교회가 있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후회’가 또 다른 차원의 교만이라면 회개는 또 다른 차원의 겸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수도 없이 상황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했었던 우리가 당시의 군중들과 제자들과 유다와 다를 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는 베드로처럼 회개의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가 있습니다. 항상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합리화시켜서는 안됩니다. 후회가 아닌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마태 27, 51)고 합니다. 후회가 회개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통로가 생긴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생겨난 것입니다.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외로움과 겸손이 세상을 구원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겸손과 외로움이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도 깨어서 기도하는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