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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0-09 13:58
   연간 제 28주일 강론 '나를 따라라(마르 10.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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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kchung6767
    조회 :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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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 강론

2015년 10월 11일 일요일

나를 따라라(마르 10.17-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 29-30)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가져 봅니다. 어릴 때부터 이른 이야기들을 들어왔고 무의식 중에 저 자신도 이러한 말을 자주 쓰곤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제가 쓰는 이 말이 얼마나 틀린 말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먼저 이러한 말이 갖고 있는 참된의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부자를 두고서 ‘저 집은 참 잘 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두고서 ‘저 집은 참 못 산다.’고 말합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못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 ‘잘 산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일 것입니다. 동시에 가난한 사람이 다 못 사는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서도 잘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잘 살고 못 사는 것의 기준은 재산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기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본다면, 부자이면서 잘 사는 사람도 있고 가난하면서도 못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부자이면서도 못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가난하면서도 못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바로 부자이면서도 잘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부자이면서도 잘 산다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든다는 것을 오늘복음에서 부자 청년을 보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계명을 잘 지켜 왔다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 가진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난 뒤에 오라고 했을 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예수님보다 재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백살에 얻은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까요? 아마도 늦게 얻은 자식이기에 이사악에 대한 애착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해 보고자 하신것입니다. 우리가 어떤것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이 우리의 우상이 됩니다. 결국 우리는 그우상의 노예가 될것입니다. 돈, 명예, 권력 등등이 그러할 것입니다.  

믿음과  순명은 함께하는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기대에 부응하는 순명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체험했던 광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체험했던 광야생활이란 무엇일까요? 그곳은 황폐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그냥 살 수 없는 곳이라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수 없는 곳, 그런 곳이라면 모두 광야일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세웠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통해서 광야를 체험합니다. 꿈을 가졌는데 그 꿈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달이 나고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자리가 광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원천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은 이 세상의 어떠한 유혹도 이겨나가게 합니다.  

부자 청년은 계명을 잘 지키고 살아왔슴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에 제자되기를 포기하고 돌아갔지만  에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조건없이 응답하며 따랐던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직업도 부모도 형제도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이러한 초심은 변질됩니다. 순수했던 마음에 세상적인 것이 들어와서 조금씩 자리를 잡습니다.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욕망이 가득찬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보잘 것 없게 느껴집니다. 화려하고 막강한 권력을 지닌 분으로 기대했던 그분에게서 더 이상 그러한 기대를 채울 수가 없슴을 알게 됩니다. 

그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만 크게 다가옵니다. 그렇게도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베드로 역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나약한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나약한 모습보다는 회개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에게 더 다가와야 합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세번 씩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 고 확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다가옵니다. 

비록 나는 예수님을 떠나도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시는 분이심을 확신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부활에대한 희망과 영원에 대한 희망을 갖고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적인 모든 것을 영적인 모든 것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살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서 실천으로 나아가는 거리가 가장 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마다 자신은 스스로 계명들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살고 있겠지만 이 계명들 가운데서도 사람마다 자신이 지키기 어려운 계명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이 청년에게는 재물의 포기가 참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나가는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는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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