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 강론
2016년 12월 4일 일요일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삶(마태 3,1-12)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 3, 11)
겸손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가지만 교만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로부터 자유하면 세상의 노예가 되지만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겸손을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만나는 예수님은 저에게 작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마음 속에 있는 세상적인 욕심을 버려야 한다. ‘봐라 세례자 요한을’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가 그렇게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모님을 보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함을 실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겸손한 삶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면 저는 세례자 요한과 성모님을 생각합니다. 성모님을 사랑을 듬뿍받고 살아가고 있는 저는 항상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성모님을 그려봅니다. 아마도 성모님은 그래서 저의 사제 서품시에 상본에 새기는 성구의 주인공이 되셨나 봅니다.
오늘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합니다 . 세례자 요한 하면 생각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주연으로서 살아도 당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상황 속에서도 이분은 당신을 주연으로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주연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을 참으로 낮추십니다. ‘자신은 작아지고 예수님은 커지셔야 하는 분’으로 그리고 ‘자신은 뒤에 오시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줄 자격조차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자신을 낮추어서 주연을 더 크게 하는 방법과 자신은 그대로 두고서 주연을 크게 하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는 위의 두 경우 중에서 한 가지 만을 하여도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의 경우는 두 방법을 다 사용하십니다. 참 겸손의 표현입니다. 겸손을 살아가겼던 분이시게 ‘하늘나라’에 대해서 더 강하게 말씀하실 수 있나 봅니다.
세례자 요한의 ‘하늘나라가 가까이 와 있으니까 회개하라’는 이 말씀을 들여다 보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는 의미로 들려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늘나라와 회개’는 조건이 성취 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회개’와 ‘하늘나라’는 함께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바로 회개이고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가 봅니다. 그냥 생각과 말로서의 회개가 아닌 삶의 변화가 수반된 회개인 것입니다. 즉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회개의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겸손’입니다.
많은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올 때 세례자 요한이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말합니다.
여기서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은 바리사이들이나 사두가이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뱀을 사탄의 상징으로 생각하기에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여기서는 그런 말이 아니라 ‘위선자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의 의미는 위선자들아,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 열매는 일회성이 아닌 전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합당한 삶이 바로 ‘겸손’의 삶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실천으로 보여주었던 그 겸손의 삶은 미래의 것이 아닌 현재의 것이어야 하고 일회성이 아닌 지속성을 가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대림 2주를 맞으며 ‘회개의 삶’, ‘겸손의 삶’을 더욱 진지하게 실천하는 시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